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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조국의 산하전
2001-12-27

양 극단이 충돌하는 공간

60명이 넘는 작가가 참여한 전시회를 이 자리에서 가늠하는 일은 무모하다(계산해보면 1인당 200자 원고지 한줄). 운좋게 노익장의 미술평론가 김윤수와 시간이 맞아 그의 유려한 식견을 공유할 수 있었지만 그것을 요약할 자리로도 마땅치 않다.

이 전시회에 대해 내가 애착을 갖는 이유는 순전히 개인적이다. 내가 알았던, 그러나 상당기간 작품을 접하지 못했던 화가친구들의 근황을 알 수 있었다는 것. 작품으로나 궁금증으로나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안창홍의 <목신>(木神)이다. 괴기의 풀밭에 살점과 핏방울의 잔혹을 흩뿌려 시대를 고발하던 그가 이제 나뭇잎과 잔가지에 진한 물감을 흩뿌려 만들어낸 <목신>은 신화와 자연의 충돌 공간을 통해 아슬아슬하게 ‘시대의 괴기’를 벗고 ‘예술의 그로테스크’에 도달한다.

홍성담 작품의 경우 양 극단은 거대-미개한 북구풍 동상과, 그 텅 빈 속을 꿰뚫고 들어가 섬뜩한 날을 번뜩이는 샤머니즘의 칼이다. 그리고, 안창홍의 미세지향과 홍성담의 거대지향 두 극단 사이에서, 박불똥은 바람에 더 가까워졌고 이인철은 ‘노역(勞役)의 묘사성’에서 ‘상상력의 구상성’으로 관심이 질적 변화했다. 강요배는 ‘흐트러짐이 짙어지는’ 차원을 발견했고 민정기는 집요한 사실주의를 벗기 시작했다. 김인순, 김정헌, 손기환, 신학철, 이종구, 장진영, 정정엽은 답보상태인 듯. 주완수는 오랜만이라 그냥 반갑고 주재환은 웃음의 철학이 더욱 어두우면서 깊어졌다.

최민화는 보라색이 훨씬 특이한 동시에 그럴듯해졌는데, 이것은 그가 ‘운동권의 야수색’에 맞서 채택한 보라색에 내재했던 ‘맞섬의 소재-구호성’이 예술적으로 어느 정도 극복되었다는 뜻이다. 최병수는 여전히 뚝심 가득하고(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아니 정확히 둘 다의 의미다) 홍선웅은 마침내 민중판화의 전아(典雅)에 달하려 하고 있다.

김추자의 노래 <거짓말이야> 선율과 박자에 80∼90년대의 온갖 정치-경제-사회-언론상을 매치시킨 전수현의 영상물은 기발했지만 가면춤은 없는 게 더 좋았겠다. 춤이 화면을 가로막을 뿐 아니라, 음악과 너무 기계적으로 맞는 까닭에 ‘기발함’을 여유와 자신만만의 예술에서 소재주의적 장난으로 전락시키는 면이 있다.

어쨌거나, 힘내시라, 모두들. ‘힘을 낸다’는 말의 의미도 모르는 사람이 힘을 낼 수는 없다. 그렇지 않은가. 기획이 행위예술이라며 안내에 열심인 조경숙도.(광화문갤러리)

김정환/ 시인·소설가 maydapoe@thrune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