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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형렬 시집 <김포 운호가든집에서>
2001-12-06

해탈한 인생의 성(性)

박봉우 시인의 <휴전선> 시비를 세운다는 강태열 노시인의 결기 섞인 성화에 주눅들어 그만 임진각역까지 따라가서 역사 뒷마당에서 오들오들 떨며 어릴 적 늦가을날 뙤약볕에 두드러기 달래던 생각에 괜히 인생 자체가 을씨년스러워지는데 이시영 시인이 웬일로 나를 따로 보자더니 또 의외로, 오랜만에 ‘시 얘기’다.

고형렬 시집. 어젯밤에 다 읽었는데 말야. 참 좋더라. 수준이 고르고. 명편도 많고. …. 그래, 이런 얘기를 하고 사는 게 편치. 역시 단체 실무책임 맡기에는 내가 늙었어… 나는. ‘아암. 좋을 거야. 좋고 말고. 그 친구 요즘 시는 내가 잘 알지.’ 그렇게 대답하면서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했고, 아무리 내가 유독 고형렬의 시를 좋아한다고 소문이 났단들, 그런 반응이 조금 미흡했던지 이시영은 며칠 뒤 시집출판기념회 연락도 챙겨주었다.

시집 제목은 확실히 고형렬답다. 촌놈 행티 벗은 줄 알았는데, 허허. “가든이 집인데 또 ‘집’을 붙여요?” 하고 나희덕이 아주 가찹게(???), 애교스럽게 핀잔을 줬으니 그건 됐고…. 그렇게 받아들고 온 시집을 나는 다 읽지 못했다. 어떻게 그러겠는가, 더군다나 좋아하는 시인의 시집을. 다만 몇편을 더듬거리다보니 눈에 띄는 것은 ‘삶-기억의 아름다운 전쟁터’라고 할 만한 <오징어 事變>, 그리고 변화를 더 대표하는 것이 <슬픈 샘의 노래>인데, 특히 앞부분이 압권이다.

여자의 그것은 슬프다, 걸어와서 다시,/ 걸어가는, 모든 여자의 그것은 위없는 슬픔,/ 말이 나오고 손이 나오고 발이 나왔다,/ …(중략)아무 말도 하지 않는, 입술을 오므리고,/ 자신이 있은 이래 아무 불평이 없는 그것은, …(중략)강낭콩이나 닭의장풀 꽃 모양 같은 살을 들고,/ 그 속에서 오줌이 나오고 그 곁에,/ 먹은 음식을 내보내는 문이 가까이 있는,/ 세상 모든 여자의 작은 그것은,/ 자신의 모든 슬픔의 양만큼 아름답다./ …(하략)

전(前) 시집에서 고형렬의 성은 가계질서를 무너뜨릴 정도로 간절한 전생과 이생의 통로였다. 이제 간절함이 눈에 띄게 줄고 해탈의 웃음이 그것을 거의 덮치는데, 놀랍게도, 비극적 서정보다 숭고하다. 아무리 비천한 삶도, 당사자에게는 어떤 문학보다 위대하다는 전언을 바로 ‘문학’에 담고 있는 것.

시 <휴전선>의, 그 일촉즉발의 긴장에서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그것이 우리가 전후의 척박한 삶과 이전투구로 뒤엉키면서 얻은, 투쟁을 의미있게 하는 여유다.

김정환/ 시인·소설가 maydapoe@thrune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