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 눈이 바다보다 넓게 내린다.” 눈발 가득한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스님은 아이의 목소리에 뒤돌아봤다. 대여섯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장님 소녀의 손목을 잡고 서 있었다. 아이는 또 말했다. “누나, 오늘 하늘이 저 스님이 입은 옷 색깔하고 같아. 저런 색을 뭐라고 하더라?” 스님은 재색이라고 말해줬다. “우리 누나는 그런 말 못 알아들어. 맞아, 생각났다. 맛없는 국 색깔이야.” 아이의 표현을 따르자면 ‘머리에 머리카락 씨만 뿌려져 있는 나물국 스님’은 그렇게 거지 남매와 처음 만났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설화 속 등장인물을 이처럼 생생하게 살려낸 것은 고 정채봉 선생이다. <오세암>에 등장하는 것은 고아 남매 길손이와 감이, 그리고 설정 스님. 숲에서 다시 만난 남매를 스님이 거둬들이고, 마침내 다섯살 길손이가 암자에서 성불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인기리에 방영된 TV시리즈 <하얀마음 백구>를 만든 애니메이션 제작사 ‘마고21’은 설악산 오세암을 둘러싼 설화를 섬세하고 생생하게 그려낸 정채봉의 동화에 주목, 2000년 7월부터 애니메이션 <오세암> 기획에 들어갔다. 현재는 메인 프로덕션이 30%가량 진척된 상태. 손오공과 신보투자,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금으로 제작되는 애니메이션 <오세암>은 2002년 하반기 개봉을 목표로 하는 70분 분량의 장편이다. 주요 타깃은 7살에서 13살 어린이다.
이정호 프로듀서와 성백엽 감독이 이끄는 제작팀은 두번의 설악산 답사를 거쳐 배경과 캐릭터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백담사에서 오세암, 미시령, 동해안을 거치면서 관음사, 오세암 내부, 주변 풍경은 물론 설악산 정경을 그대로 옮겨왔다. “<백구>가 일일 드라마라면 <오세암>은 미니 시리즈 같은 느낌이죠. 좀더 시적이고 깊이가 있다고 할까요. 보는 이들이 동양화를 감상하는 듯한 기분을 <오세암>에서 느꼈으면 합니다.” 마고21 대표를 맡고 있는 이정호 프로듀서는 이렇게 말한다. <하얀마음 백구> 스탭이 그대로 뭉친 만큼 캐릭터 변별에도 신경을 썼다. 몇 개월 만에 태어난 캐릭터들은 모두 눈이 강하게 표현됐다.
원작을 최대한 살리자는 취지지만, 길손이의 엄마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강조할 예정이라고. 길손이가 관세음보살을 거짓없이 따르게 된 동기는 바로 모성 갈구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만큼 함축적인 원작을 구체적인 에피소드로 풀어내는 것을 중요한 관건으로 삼고 있다. 설정은 다르지만 <오세암>은 동화 <빵 포도주 마르셀리노>와 매우 비슷하다. 스페인 소년 마르셀리노 역시 프란체스코수도원 골방에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갔다. 그러나 마르셀리노가 식은 나물국과 잿빛의 이미지를 연결해낼 수 있었을지 바람의 손자국, 발자국이란 표현을 구사할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다.
작가가 1984년에 완성한 <오세암>은 1985년 초판 이후 10만부가 발행된 스테디셀러다. 정채봉 선생의 숨결에 마고21의 손길이 더해져서 어떤 이미지로 태어날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국악기와 양악기를 동시에 사용한다는 방용석 감독의 사운드도 기대된다.
가만히 귀기울여보자. 찬바람 몰아치기 시작한 창가 어디쯤에서 길손이 목소리가 들릴지도 모른다.
“누나, 꽃이 피었다. 겨울인데 말이야. 바위틈 얼음 속에 발을 묻고 피었어. 누나, 병아리의 가슴털을 만져본 적 있지? 그래. 그처럼 꽃이 아주아주 보송보송해. 저기 저 돌부처님이 입김으로 키우셨나봐.”
김일림/ 월간 <뉴타입> 기자 illim@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