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전시회 팸플릿이 왔을 때 ‘최치숙’은 내게 모르는 이름이었다.
내가 미술판과 친하게 지낸 지 근 20년이니 모르는 사람이 보내는 팸플릿은, 그 많은 ‘택배’ 시집(죄송. 나도 많이 냈지만. 하지만 나는 아는 사람한테도 만날 기회가 있으면 전달하지, 우편으로 부쳐주고 시침떼지는 않는다)만큼이나, 신기하다기보다는 귀찮은 편이다.
봉투를 뜯고 사진부터 힐끗 들여다보았다. 수덥지분한데, 역시, 나와 낯익은 나이는 되겠지만, 낯익은 얼굴은 아니다. 그런데, 페이지를 넘겨 맨 뒷장을 펴던 그 순식간에 그녀의 작품들이 내 눈에 잔상을 남겨놓았다. 그림이 요란해서가 아니다. 대저 크기와 색갈이 요란굉장(하기만)한 그림들은 눈을 밀어낼 뿐 망막에 감동의 흔적을 남기지 못한다.
전시회 제목이 그렇듯 ‘일상’을 주제로 한 그녀의 판화들은 모두 섬세하고 섬세함이 은은하게 깊다. 특히 목판화는 놀랄 정도로. <새벽>은 판화에서 보기드문 회화성(picturesque)을 구도와 색채 양면에서 발하고 <유혹>에서는 소박하면서도 소박주의로 기울기는커녕 오정희 소설을 연상시키는 예민한 중년 여성의 감수성이 묻어난다.
‘은은하게 깊은 섬세함’이 삶의 연륜을 드러내는, 언뜻 자연스럽지만 놀라울 정도로 적확한 매개로 작용하는 것. 자연=적확의 등식은 자연에서는 당연하지만 예술에서는 두배로 어렵다. 더군다나 ‘문자의 말’에서보다 ‘그림의 말’에서 더 어렵다.
일상 연작(모두 수성목판, 꽃피우기, 길찾기, 마음 간수하기, 하늘보기, 뜨락 등의 부제가 붙어 있다)은, 몇점 ‘상상력의 태작’이 있지만, 대체로 위의 등식을 한 차원 더 과감하게 밀어부친 것으로 보인다.
더욱 그윽하면서도, 심지어 옛날 창호지 비슷하게 보인면서도, 동시에 중년의 감수성이 더욱 예리하게, 현대적으로 빛난다. 미술적으로 말하자면 간혹 오래된 자욱으로 뭉개지면서도 뭉개짐이 선명하고, 그 이상, 즉 ‘뭉개짐의 선명함’까지 그녀의 작품들은 나아간다. 이 작품들은 나는 ‘뭉개짐의 선명도’라 부르고 싶다. 이때 ‘도’가 ‘度’든 ‘圖’든 상관없겠다. 아니, ‘度=圖’면 더욱 좋겠지. 이미 기우겠지만, ‘道’는 피해가기를.
ps. 알고보니 그녀는 나의 문학죽마고우이자 ‘북한 돕는’ 치과의사 유영재의 마누라란다. 어, 홍준이 형(유홍준)도 다녀갔어.… 허참. 쑥스럽구만. 그나저나 가봐야겠네.김정환/ 시인·소설가 maydapoe@thrune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