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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의 탈을 쓴 청춘의 불안
2001-10-18

후루야 미노루의 <두더지>

홀어머니와 컨테이너 집에 살면서 보트를 빌려주는 걸로 생계를 유지하는 중학생 스미다. 그는 철저하게 보통 사람으로, <두더지>처럼 땅 속에 엎드려 지내고 싶다. 그리고 아무런 재능도 없는 주제에 자신이 무언가 될 거라고 믿으며 이상을 향해 달려가는 녀석들을 용서할 수 없다. 정말로 진실되게 만화가의 꿈으로 다가가는 키이치를 보며 감동을 받기도 하지만, 그래도 자신은 외친다. “난 승부 따위 하지 않아. 꿈이라는 링 위에 오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나는 일생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겠다고 맹세해. 그러니 누구도 내게 피해를 입히지 말아 줘!”

쓰다쓴 일상 속으로 침잠하는 젊음

후루야 미노루의 청춘만화가 제3라운드에 접어들었다. <크레이지 군단> <그린 힐>을 이어 <두더지>. 이들은 연작이라고 할 만큼 비슷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 주인공은 왕따 학생, 변태 아저씨, 원조교제 소녀, 소매치기, 가출소년과 같은 사회적 마이너리티이고, 한 줄기로 이어지는 큰 사건의 굴곡보다는 그때그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일상사들을 묘사하는 데 집중한다. 대책없는 주인공들의 개그 소동 속에 언뜻언뜻 미래가 보이지 않는 청춘의 좌절감을 그려낸다. 그러나 그 색채는 분명히 변해가고 있다.

<이나중 탁구부>의 명성을 등에 업은 만화가여서인지, 그의 주인공들은 외모에서부터 강한 개성을 지닌 개그파들로 구성돼왔다. 그런데 <그린 힐>에 접어들어 적어도 외모에서는 평범형인 세키구치를 1인 주연으로 내세우는 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그 역시 표지를 지나면서 바로 가면을 벗었고, 오카나 이토와 같은 개성파 캐릭터들 머리 위에 올라서서 난잡한 개그 퍼레이드를 주도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고독한 늑대’를 꿈꾸며 해변으로 달려갔다가도, 곧바로 ‘외로버∼’ 눈물을 흘리며 돌아와 바보 친구들과 술판을 벌여야 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두더지>의 스미다는 철저하게 내면의 세계에 빠지고 그 고독 속에서 살아간다. 여전히 그의 주변에는 가짜 만화가한테 속아 펠라치오를 당하는 아카다나 우연히 만난 소매치기가 시키는 대로 그의 애인에게서 총각 딱지를 떼는 쇼조와 같은 개그 캐릭터들이 황당무계한 사건들을 만든다. 그러나 개그의 빈도는 현격하게 줄어들었고, 주인공의 사변과 독백이 넘쳐난다.

이러한 만화를 이제 무엇이라고 해야 하나? 뚜렷한 줄거리 없이 생활 속의 사소한 에피소드를 통해 독자들을 사색으로 이끄는 것은 쓰게 요시하루를 떠올리게 하고, 그 공간이 현대라는 점은 오카자키 교코의 만화와 닮아 있다. 말하자면 일본만화 내에서 뚜렷한 한 줄기를 유지하고 있는 ‘사소설’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한밤중에 혼자서 달리기를 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장면에서는 훌륭한 문학적 품격을 느낄 정도다. 그러나 <두더지>에는 여전히 <이나중 탁구부>의 무책임 개그의 기류가 뚜렷이 잔존하고 있다. 좌충우돌의 슬랩 스틱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사소한 말받아치기 끝에 돌출적인 행동으로 독자들을 공격하는 개그 기술은 빈번히 사용된다. “누나, 우리 영혼은 돈으로는 못 사는 거지?” “200만엔을 줄 테니 똥 먹으라면 먹을 거예요?” “응. 100만엔으로도 돼.” “오오 반액으로.” 굳이 이름붙이자면 ‘사소설적 청춘 개그만화’라고나 할까?

나는 <크레이지 군단> 등장 때부터 후루야 미노루가 모치즈키 미네타로의 내력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가 의심해왔다. 모치즈키는 80년대 <물장구치는 금붕어> <카오루의 일기>로 무책임 청춘 개그의 장을 연 이후 점점 어두운 색채로 변모, 90년대 <좌부녀> <드래곤 헤드>의 서스펜스 호러로 침잠해 들어갔다. 극단적 웃음에서 극단적 공포로 넘어가는 그 변화 속에서도 끊임없이 우리에게 던졌던 물음은 하나였다. “청춘이란 무엇인가? 왜 꿈을 꾸어야 하는가? 평범한 나를 그냥 이대로 놔두면 안 되는가?”

" 왜 꿈을 꾸어야 하는가?"

<두더지>에서 스미다를 쫓아다니며 “죽어라, 다 죽어”라고 외치는 악령은 청춘의 내면에 스며들어오는 정체불명의 공포다. 게이코가 거짓말로 꾸며낸 살인자 오빠의 이미지(1권 78쪽)는 그림의 스타일까지 모치즈키의 만화, 특히 <좌부녀>를 떠올리게 한다. 1권의 뒤 표지에 그려진 여자의 모습처럼, 청춘은 싱싱하고 탐스러운 몸을 하고 있지만 고개를 돌리면 긴 혀를 뽑아 우리를 잡아먹는 악마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두더지>는 절대 깊이를 얕볼 수 없는 일본 청춘만화의 해류 속에 존재한다. 우연히 얻게 된 권총의 에피소드는 마쓰모토 다이요의 <푸른 봄>, 드럼통으로 만든 목욕통은 쓰게 요시하루의 <이씨 일가>의 오마주로도 느껴진다. 이 두 장치는 모두 무언가를 벌일 듯하면서 슬그머니 사라지는데, 그 각각에 대해 독자들은 저마다의 스토리를 쓰게 된다. 만화가들도 마찬가지다. 후루야와 비슷한 연배의 청춘만화가 이노우에 산타와 마쓰모토 다이요 역시 ‘청춘의 불안과 공포’를 가지고 자기 식의 만화를 만들어간다. 이노우에는 <인인 13호>를 통해 정말로 모두 죽여버린다. 마쓰모토는 <푸른 봄>으로 사색하고 <핑퐁>으로 여전히 꿈의 소중함을 이야기해준다. <두더지>는 그 중간 어디에 있다. 아직도 생각이 많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