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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의 거름, 1%의 씨앗
2001-10-18

<사이버걸 마호로>

만화가 성공적인 미디어 콘텐츠 상품이 될 확률은 어느 정도나 될까? 일단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만화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고 있는 일본을 예로 들어보자. 일본에서는 한해 대략 2천편 정도의 TV와 비디오용 상업애니메이션이 제작된다. TV시리즈가 일반적으로 13화에서 26화 정도에 완결되고, OVA의 편수를 감안해 한 작품당 20화 정도로 나누면 대략 100여개 정도의 작품이 만들어진다. <포케몬> <철권>처럼 게임에서 <성계의 문장> <은하영웅전설>처럼 소설 등에서 비롯되는 것도 꽤 많아지는 추세긴 하지만, 역시 아직까지 애니메이션의 원천지는 만화다. 따라서 약 60여개 작품은 원작자에 만화가의 이름이 실린다고 봐야 할 것이다.

‘만화왕국’ 일본에서는 한해 6천편 정도의 만화가 나온다. 그중에서 재미와 그림실력을 인정받아야만 잡지에도 실리는데, 그 만화들도 다시 100 대 1의 경쟁을 통과해야만 애니메이션의 원작이 되는 축복(?)을 받을 수 있다. 그 애니메이션 속에서도 ‘히트’라 할 만한 성공에 이르는 경우는 10∼20%에 불과하니 한해 10편 정도의 ‘잘 팔리는 문화상품’을 위하여 수천편의 연재만화, 수십만장의 만화원고가 그려진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만들어진 애니메이션 가운데 ‘대박’이라고 불릴 만한 것들은 몇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다. 워낙 독자적 세계를 꾸리고 있는 ‘미야자키 애니메이션’을 제외하고, 90년대 이후 21세기 초까지 일본 애니메이션계에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을 뽑으라면, <미소녀전사 세일러문> <신세기 에반게리온> <포케몬>을 들 수 있다. 특히 ‘에바’(에반게리온의 약어)는 오타쿠 문화의 양성화, 애니메이션 문화에 대한 사회적 분석, 이후 작품에 대한 영향력 등 여러 면에서 많은 이슈가 됐던 작품으로 제작사 가이낙스는 이 작품으로 회생했다. <그남자 그여자의 사정> <프리크리> 등도 크게 주목됐으나 대중적 취향에도 마니아적 취향에도 뭔가 불충분한 자기 만족적 성향의 작품이었다.

지난 10월5일부터 일본 <TBS> BS-1에서 방영을 시작한 가이낙스의 <사이버걸 마호로>는 이 회사의 ‘마니아성’의 원천이랄 수 있는 ‘미소녀’, ‘SF’, ‘로봇’, ‘전쟁’, ‘패러디’로 회귀를 선언하는 작품이다. 마호로는 일반인이 알지 못하는 사이 지구를 침공한 외계인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된 비밀조직 베스파에서 활약하던 최강의 인조인간. 전투병기로서의 수명이 다해 가자, 그녀는 자신을 위해 희생된 사령관의 외아들 ‘미사토 스구루’의 뒷바라지를 하며 살아간다. 대부분의 전투기능을 제거한 채 398일 남은 최후를 맞기까지 메이드로 일하게 된 마호로와 주변 사람들이 좌충우돌하는 코믹 SF물이다.

눈여겨볼 것은 히트 메이저 제작사의 의욕적인 차기 TV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원작인 <사이버걸 마호로>를 그린 만화가다. 국내에도 출간된 이 작품을 봤다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겠지만 원작 만화가 치타마 보우는 성인포르노 만화가 출신. 한국 기준으로 ‘음란물’ 저작자인 셈이다. 일본의 영화산업이 로망포르노를 성장의 발판으로 삼았듯, 일본의 애니메이션, 만화시장에서 성인포르노물은 작가들의 경제력과 실력 양성, 지면 확보를 맡아주는 ‘양성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 많이 제작되는 ‘메이드물’, 하녀복을 입은 미소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애니메이션들 가운데서 ‘히트’한 <강철천사 쿠루미>(가이 사쿠 원작),<하나요코우 메이드대>(모리시게 원작) 등 역시 원작자가 ‘음란물 만화가’ 출신들이다.

얼마 전 헌법재판소의 판결로 등급외 상영관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가장 근원적인 부분에서는 몇몇에 의해 문화 자체가 통제되는 풍토는 그리 변한 것이 없다고 생각된다. 어느 유명 애니메이션 감독이 인터뷰에서 말했던 것처럼, 훌륭한 1%의 문화적 산물은 99%의 쓰레기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표현과 발상의 자유가 제한되면 제한될수록, 거기서 탄생된 산물은 굴절되고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세준/ 만화·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neoeva@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