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보이지 않기에 그만큼 더 아름답다.”
언뜻 이런 말은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이 말은 사기다. 음악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음악이 왜 아름다운가에 관하여 실제로 아무것도 알려주는 것이 없다. 음악은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들리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게 ‘물리적으로’ 와닿는, 실제로 그 주파수들의 떨림이 내게 오는 어떤 것이다. 진정한 예술가라면 음악이 ‘들린다’는 있는 그대로의 육체적 진실에서부터 출발한다.
허진호 감독은 적어도 ‘보이지 않기에 아름답다’식의, 가짜로 그럴듯한 언어를 말하고 싶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감독이다. 그는 때처럼, 여전히 소시민적이다. 그의 카메라는 <봄날은 간다>에서도 소시민적인 배경을 가진 남자주인공의 막막함을 포착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 주인공들 역시 사물과 소리를 있는 그대로 ‘포착’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점. 첫 영화에선 사진사, 이번 영화에서는 사운드 기사. 그들의 행위는 예술적 행위라기보다는 노동에 가깝지만 예술적 행위가 아닌 것도 아닌데, 그래서 그들을 감독의 분신들로 보는 게 무리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봄날은 간다>의 음악은 때처럼 조성우가 맡았다. 그의 음악은 장르의 관행이나 규범을 초월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소시민적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의 음악은 중산층의 음악이다. 이번 영화에서도 편안하고 차분한, 감상적인 멜로디들을 화면에 붙이고 있다. <봄날은 간다>의 주멜로디는 우리에게 익숙한 두개의 노래이다. 하나는 ‘봄날은 간다’라는 가사가 들어 있는 뽕짝이고 또 하나는 샹송 <Plaisir D’amour>(사랑의 기쁨)이다.
앞의 뽕짝은 할머니와 상우와의 연속성을 음악적으로 재현한다. 사실 할머니와 상우는 연대감을 가지고 있다. 할머니는 가부장제의 억압에서 비롯한 상처를 가지고 있는 반면 상우는 가부장제의 흔들림에서 비롯한 상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이한 실연의 연대감을 은유적으로 표시하는 이 뽕짝은 그럼으로써 소시민적 막막함의 면면한 흐름을 상징하는 노릇도 하고 있다. 아코디언의 감상적인 톤을 잘 살려 편곡한 조성우의 뽕짝은 어딘지 약간 중산층화된 깔끔함이 돋보인다. 그러한 처리가 뽕짝이 가진 소시민성의 급진적인 저속성을, 영화가 전체적으로 그러하듯, 깎아낸다.
또 하나의 노래 <사랑의 기쁨>은 주인공 상우가 겪는 연애의 과정을 상징한다. ‘소리를 따는’ 상우의 행위는 우연히 은수가 흥얼거리는 이 멜로디를 포착하는 행위로 바뀐다. 이 대목도 재미있는 상징을 제공한다. ‘있는 그대로’ 포착하는 행위가 ‘사랑의 행위’로 바뀌는 것 말이다. 허진호는 예술이라는 노동이 어느 순간 그렇게 변하는 지점에 대해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이 대목에서 상우의 아픔도 시작된다. 상우에게는 자신의 일이 ‘의미의 이동’(shift of meaning)을 겪었으나 은수에게는 그렇지 않다. 은수는 상우에게 ‘이 일이 끝나면 뭐 할 거예요’하고 묻는다. <사랑의 기쁨>이라는 멜로디는 그 다음부터 ‘사랑의 아픔’을 상징하는 역설적인 멜로디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삶을 어떻게 ‘있는 그대로’ 보여줄까? 대숲에서 들리는 솨--소리를 어떻게 있는 그대로 포착할까? 불가능.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척하기 위해 ‘예술적 기술’이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기술의 핵심은 ‘구조’를 보여주는 데 있다. 나그라 들고 다닌다고 소리가 따지는 게 아니다. 마이크 대는 자리가 따로 있고 강조해야 할 EQ 대역이 따로 있다. 이번 영화에서 허진호는 소시민적 막막함의 밑에 있는 구조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래서 영화가 더 좋아진 것 같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