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계 큰 별 하나가 졌다. 원로만화가 김종래 화백이 지난달 28일 지병으로 타계한 것(향년 74). 그동안 크고 작은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건강이 허락하는 대로 만화계 행사에 참석해 후배만화가들을 격려해주던 김 화백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소식에 만화계는 슬픔에 잠겼다.
아마 요즘 독자들은 김종래 화백을 잘 알지 못하리라.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40대 이상의 중장년층 독자라면 김 화백의 <엄마찾아 삼만리>를 읽고 눈물을 흘린 기억이 아직도 생생할 것이다. <엄마찾아 삼만리>(1959년 만화세계사 출간)는 술과 노름으로 방탕한 생활을 하는 아버지 탓에 팔려간 엄마를 찾아 전국을 떠도는 아들의 눈물겨운 이야기.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당시의 슬픈 시대상황과 맞아 떨어지면서 만화사상 유례없는 10판 출간의 신화를 이뤘다. 판매부수 또한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1만5천부에 달했다.
▣전통극화의 개척자
김 화백은 박기당과 더불어 만화대본소의 태동기인 1960년대에 한국만화의 전성기를 연 주인공이다. 일본만화풍이 팽배했던 초기 만화계에 독창적인 만화작법을 선보이며 우리 고유의 극화를 완성시켜 ‘전통극화의 개척자’라고 불린다. <엄마 찾아 삼만리> <마음의 왕관> <황금가면> <도망자> <앵무새 왕자> <울지마라 은철아> <눈물의 별밤> <어머니> 등 만화가 생활 25년간 500여종의 작품을 남긴 그는 한국만화의 예술성을 한 단계 끌어올린 작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27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그는 교토 회화전문학교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뒤, 1946년 귀국했다. 그가 만화와 인연을 맺은 것은 군대 시절. ‘코주부’ 김용환의 후임으로 육군본부 작전국 심리전과에 배속받아 전단을 그렸다. 군에서 제대한 그는 1945년 군대 시절 그린 반공만화 <붉은 땅>이 우연히 출판사 사장의 눈에 띄어 재출간되면서 만화가의 길에 접어들었다.
1955년 첫 창작만화 <박문수전>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한 그는 타고난 재능으로 동양화에 바탕을 둔 전형적인 삽화체의 그림들을 완성한다. 이때 내놓은 대표작이 <엄마찾아 삼만리>와 <눈물의 수평선>. 전쟁의 상처와 시대의 아픔을 잔잔하게 다룬 작품들이다.
그의 만화가 전성기를 꽃피운 것은 1960년대. <마음의 왕관> <어머니> <황금가면> <앵무새 왕자> 등 현실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고발한 이 시기의 작품들은 김 화백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후 그는 비극 일변도의 시대극에 국한되었던 만화의 폭을 넓혀 <곰보부자> <쌍둥이전> <병풍도령> <유도> 등 코믹물과 스포츠 만화 등 다양한 소재의 작품들을 선보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의 작품세계는 또 한번의 변화를 보여준다. 기존 장편 중심의 형식에서 벗어난 옴니버스 형식의 단편만화를 발표한 것.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도망자>는 1969년 첫편이 나온 이래 1978년까지 무려 10년간 창작된 만화사상 기록적인 작품이다.
▣만화계의 운보, 그가 떠난 뒤안길
하지만 그는 1978년 갑자기 “만화계를 떠나겠다”고 선언해 충격을 안겼다. 매년 5월만 되면 만화가를 마치 죄인 취급하는 데 진력이 난데다 건강에 심각한 적신호가 울리고 있었기 때문. 고민 끝에 만화가를 그만둔 그는 동양화에 전념하지만 갑자기 도진 심장병 탓에 결국 붓을 완전히 놓고 말았다.
그는 만화가 생활 25년간 한재규, 이희재, 홍금보, 박성래, 대철, 박상호 등 20여명의 문하생들을 길러냈다. 그의 교육방법은 대단히 엄격하기로 유명했다. 입문한 지 3년이 될 때까지는 결코 그림을 맡기지 않았고, 3년이 지나서야 겨우 배경 그리는 것을 허용했다. 그의 문하생들은 이런 고난의 과정을 거쳤기에 그림 실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만화계는 김 화백의 부음을 전하면서 착잡함을 느꼈다. 그의 부음 소식과 ‘운보’ 김기창의 부음 소식에 대한 사회의 반응이 너무나 큰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운보의 부음을 대서특필한 것은 물론 연일 특집을 꾸며 운보가 미술계에 끼친 영행을 분석했던 언론이 ‘만화계의 운보’라고 할 수 있는 김 화백의 부음을 다루는 데는 너무 인색했기 때문이다.
김 화백의 장례를 만화인장으로 치루지 못한 것 또한 아쉬움으로 남는다. 만화계에서는 “미리 만화인장을 계획했었으나 김 화백이 예상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다”고 얘기하지만 김 화백만큼은 만화인장으로 치뤘어야만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또 한 가지. 이번 김 화백의 타계를 계기로 원로만화가들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시급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원로만화가들의 경우 만화는 물론, 참고 자료조차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떠한 형태로든 원로만화가에 대한 정리를 미리 해둘 필요성이 있다.
▣빛이 되어 남은 거목
마지막으로 김 화백의 문하생 출신인 만화가 이희재씨가 스승을 추모하며 한국만화가협회 게시판에 쓴 글을 소개한다.
“50년대로부터 우리 만화사의 고유한 페이지를 장식해 오셨던 김종래 선생님. 이천일년 1월28일 오전 운명을 하셨습니다. <엄마찾아 삼만리> <눈물의 별밤> <어머니> <황금가면> <울지마라 은철아> <앵무새 왕자> <곰보부자> <도망자> <내조국> 등 선생이 남긴 만화의 봉오리는 수백편이 넘습니다. 작품 하나하나는 우리의 만화사에 광채가 되어 빛으로 남았습니다. 가장 어려운 시절, 만화라는 사랑으로 세상을 어루만져 주셨던 선생님. 선생님의 독자였던 많은 사람들과 뒤를 잇는 후배들이 잊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선생님 영전에 고개숙이며 명복을 비옵니다.”
김이랑/ 만화평론가 dreamy21@lyco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