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맡은 사기스 시로는 솔직히 말해 한국영화에서 그전까지는 찾아볼 수 없었던 완성도를 지닌 음악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는 알려져 있다시피 공전의 성공을 거둔 <에반게리온>의 음악을 맡았던 사람이다. 이 만화영화의 음악은 정말 훌륭했다. 만화다웠고, 때로는 그 이상이었다. 어른스러운 음악이었다. 걸작 영화음악을 만든 사람답게 사기스 시로의 음악은 <무사>의 완성도를 한층 높여주고 있다. 한마디로 깔끔하고 탄탄하다. 그가 속해 있었던 의 퓨전재즈는 오히려 너무 깔끔해서 별게 아니었는데 <무사>의 음악은 완성도 자체가 우리에게 신선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다. 멜로디나 리듬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닐지라도 이만하면 ‘표준’이라는 말을 들을 만한 음악이다. 일본사람들, 기본이 확실한 음악은 우리보다 월등하게 잘 만든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악기나 사운드의 선택에서 군더더기가 전혀 없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브라스 사운드, 피리 소리, 팀파니 소리, 스트링 소리, 신시사이저 소리 할 것 없이 모든 악기가 자기 음색을 명확하고도 날카롭게 발휘하도록 했다. 악기들이 결합될 때에는 따로 놀지 않도록 세심하게 편곡했다.
다음으로 눈에 띄는 것이 여백이다. 그 여백 때문에 시로의 음악은 ‘사막의 음악’이 된다. 사막의 광활함을 여백없이 어떻게 음악적으로 표현할 수가 있겠는가. 초원의 밤의 적막감을 도대체 여백의 미가 죽어 있다면 표현할 수 있을까. 시로는 포즈를 줄 때에 충분히 포즈를 주고 다음 파트로 넘어간다. 하나의 악기를 선택하면 그 악기를 충분히 부각한다. 많은 경우 그 악기들은 중첩되지 않는다. 독자적으로 울린다. 다른 군더더기들이 그 악기의 개성을 흐릿하게 만들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러고나서 다음 대목으로 넘어가거나 그 악기에 새로운 악기가 추가된다.
리듬은 주로 발걸음의 속도에 맞추어져 있다. 예리한 선택이다. 이 영화가 ‘간다’는 행위를 중심으로 굴러가는 영화라는 점을 시로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 점을 리듬파트에서 간과한다면 음악은 지리멸렬이다. 음악을 아무리 천재적으로 쓰는 사람이라도 영화음악을 만들 때 그런 점을 망각하면 음악에 포인트가 없어진다. 그러나 시로 같은 프로는 절대 그러는 일이 없다. 사막의 모래바람을 헤치고 걸어나갈 때의 리듬은 느리고 장중하다. 안성기가 활을 들고 튀어나가는 장면의 리듬은 뜀박질의 속도로 긴박하게 울려댄다. 전투할 때는 오히려 리듬을 배제하고 서정적인 멜로디를 깔아줌으로써 처절한 맛을 더해주고 있다. 그것 역시 영리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전투장면에서는 오히려 칼 부딪치는 소리, 살 베는 소리, 피흐르는 소리 같은 것들이 리듬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는 음악적인 리듬을 생략해야만 모든 것이 더 산다.
그러나 영화 전체를 놓고 볼 때, 아무래도 아쉬움이 남는 영화이다. 길의 논리는 ‘간다’는 행위 자체가 만든다. 아무리 발걸음이 우발적이라 해도 ‘간다’는 사실이 명확하면 그 모든 우연이 필연적이다. 목적지를 찾아가든, 목적지가 없든, 혹은 가다가 못 가든 간에 ‘간다’는 행위를 중심으로 내러티브가 구성되는 영화는 그렇기 때문에 자주 우리의 인생을 깊이있게 보여준다. 그런데 <무사>는 바로 그 점 때문에 흔들리고 있다. 영화가 후반부로 들어서면서 등장인물들은 가고 있기보다는 ‘가게 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바뀐다. 거기서부터 <무사>는 중심을 잃고 기다림의 영화로 바뀌고 만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