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펴면 추억이 밀려온다. 섬세한 펜, 수채물감의 미묘한 농담, 화려한 컬러, 꽉 짜여진 화면의 일러스트들은 1993년 처음 만날 때부터 박희정의 만화를 대표해온 기호다. 데뷔 이후 지금까지 그의 일러스트는 자신이 연재하는 잡지의 표지를 장식했고, 잡지의 창간을 알리는 브로슈어가 되었고, 캘린더가 되었으며, 전화카드로 탄생했다. 박희정의 일러스트는 주인공들에게 컬러를 선사하는 단순한 수공에서 벗어나 배경과 소품, 캐릭터의 표정을 통해 작품 전체를 대표했다. <호텔 아프리카>의 일러스트가 보여준 황무지와 도로, 푸른 하늘 그리고 낡은 소파의 이미지는 그대로 작품의 의미를 드러내는 기호였다. 자연과 도회를 넘나들며, 잡지와 술잔이 뒹구는 일상과 거대한 달과 앙상한 나뭇가지와 금붕어가 존재하는 환상이 함께하며, 실존적 슬픔을 보여주는 캐릭터의 표정까지. 박희정의 일러스트는 일러스트를 넘어서는 독자와의 의미공감을 끌어내는 작품의 하나였다.
박희정 만화 기호의 모든 것
2001년 8월, 새롭게 출범한 시공사 만화신사업부의 첫 번째 기획출판물로 선정된 박희정의 일러스트집 <시에스타>는 8년 동안 작업해온 박희정 만화를 대표하는 일러스트를 모은 책이다. 1993년 순정만화잡지 <윙크> 창간과 함께 데뷔한 박희정은 화면 위에 이미지의 성찬을 매력적으로 풀어놓으며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그가 보여준 도회적인 캐릭터의 완성도(<호텔 아프리카>에서 과감하게 흑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은 미국과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를 사로잡은 검은 아름다움에 대한 발빠른 반영이었다), 독특하게 화면을 분할하며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과 극단적이진 않지만 적절하게 변화하는 앵글(칸 사이를 없애는 화면 분할이나 한 장면을 여러 각도에서 잡아내는 앵글 사용 등)은 독특한 박희정만의 이미지를 연출해냈다. 몇편의 단편을 발표한 뒤 1994년 연재를 시작한 <I Can’t Stop>은 미소년을 주인공으로, 비인기종목인 배구를 소재로 다룬 스포츠물이었다. 예상보다 빨리 불완전한 마무리로 중도하차한 <I Can’t Stop> 이후 1995년부터 박희정은 <호텔 아프리카>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97년까지 3년 동안 연재된 <호텔 아프리카>는 박희정이라는 이름을 90년대 순정만화의 전당에 명예롭게 등극시킨 화제의 작품이었다.
<호텔 아프리카>에서 그가 보여준 시각적 이미지는 로큰롤이 바로 흘러나올 것 같은 50∼60년대 미국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시골의 한적한 호텔이라는, 시간과 공간이 멈춘 사막 한가운데에서 벌어지는 일상의 이야기들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혹은 시골과 도시를 오가며 전개된다. 가벼운 개그에서 정체성의 문제까지 <호텔 아프리카>는 90년대적인 정서와 감수성으로 일상에서 건져낸 이야기를 세련된 화면에 담아냈다. <호텔 아프리카>의 놀라운 성공 이후 박희정은 1997년 <The STUPID>, 1998년 <Martin & John>, 2000년 <Secret>를 발표하며 독특한 작품 세계를 넓혀갔다.
2001년, 새로운 시작
일러스트집 <시에스타>에 주목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이다. 2000년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던 박희정은 2001년 초반에 잠시 공백기를 가진 뒤 <시에스타>와 SICAF Collection에 단편 <엠버>를 발표했다. 공백 이후 발표한 이 두편의 색다른 시도는 8년 동안의 창작활동을 갈무리하며 작가에게 새로운 창작의 지평을 열어줄 것이다. 두 번째 고급스러운 장정으로 편집된 비싼 가격의 일러스트집의 성공적 판매(<시에스타>는 재판에 돌입했다)는 만화책도 고가의 소장용 시장이 존재한다는 마케팅적 가능성(적절한 수요를 분석하고 잘 만들면 팔린다는)을 선보였다. 세 번째 의미는 만화출판이 콘텐츠의 다양화를 통해 활로를 모색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일회적으로 소비되는 만화가 아니라 독자들의 서가에서 영속하는 책. 만화책에 대한 지금까지의 고정관념을 깨나가면서, 한국만화도 새로운 문화로 성숙되면서 정착되어갈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의미에 앞서 <시에스타>가 사랑스러운 까닭은 처음부터 끝까지 손으로 꼼꼼하게 그린 그래픽의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