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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음악 <지옥의 묵시록>
2001-09-13

끝에서 끝으로

시작. The End. 이 영화의 오프닝은 도어즈의 <The End>, 끝이다. 끝이 시작인 영화다. 터질 듯한 살인에의 욕정과 혼돈, 습기와 광기의 상징인 야자수들의 느린 흔들림. 그 야자수의 정글 안에 숨겨진, 사랑과 돌봄의 인간성과 작별을 고하고 살육과 광기의 세계로 진입하는 신의 아이들의 놀이가 어디까지 가는지, 그 끝이 어디인지 엿보기 위해 날아다니는, 파리와도 같은 헬리콥터들. 이윽고 불이 지펴진다. 야자수들은 화염에 휩싸인다. 네이팜 탄. 이미 영화의 시작에서부터 관객의 얼굴을 붉게 물들이는 화염과 함께 도어스의 <The End>는 고조되면서 이 영화가 끝에 관한 영화임을 알려준다. 종말은 먼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이다. 종말이 맨 처음에 미리 와 있다.

종말은 희망이 아니라 정글 속에 들어 있는 끔찍한 전쟁 지옥에 와 있다. 짐 모리슨은 영화의 맨 처음에 “This is the end”(여기가 끝이야)라고 말한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식 인사법이다. 신화의 세계는 ‘이젠 안녕’이라고 작별을 통해 시작되고 ‘안녕!’이라는 말은 ‘어서와’라는 말이다. 웰컴 투 마이 월드. 그리고 굿바이. 동시에 <The End>는 60년대 후반을 산 미국사람들의 정신상태다. 미국사람들은 베트남전을 통해 자신들의 건국이념이 극단적으로 배반당하는 광기를 체험하면서 동시에 사이키델릭 혁명을 통해 환영으로나마 선적인 상태에서 만날 수 있는 본연의 자기 자신을 체험한다. 그 극단적인 정신은 속에서 네이팜 탄이 남의 나라 정글을 초토화하는 동안 ‘사랑과 평화’라고 말한다. 먼 트립의 끝에서 몸으로 껴안은 낱말들이다. 평화, 평화. 그러나 이미 그들은 “여기가 끝이야”라고 말한다.

뱃길. 현대 오디세이. 임무를 받은 마틴 신이 타고 가는 배는 신화의 강을 타고 올라가는, 미국화된 오디세이이다. 그 배는 우화화된 전쟁의 신들이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때로는 잔인하게, 때로는 우울하게 나타나는 걸 목격한다. 사실상 이 여행은 지나치게 환상적이고 이국적이다. 아니, 실은 그 ‘별세계’인 듯한 느낌이 전쟁을 겪은 당사자들의 느낌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 전쟁 자체는 아니다. 전쟁은 그 안에 있는 사람들과 그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극단적으로 구분한다. 그래서 전쟁은 안쪽에서도 진실이 없고 바깥에서도 진실이 없다. 이 영화는 아직 미국사람들이 그 ‘안쪽’에 있던 시대에 만들졌다. 그래서 지나치게 심리적이고 병적이다. <플래툰> 정도에 이르면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객관적으로 그 전쟁을 바라보려는 시도를 하게 되겠지만 이 영화는 아직 그렇지 않다. 미국의 집단정신은, 적어도 이 영화가 이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심리 속에서는, 아직 정신병 상태이다. <디어 헌터>와 비슷한 점이 그 점이다. 그래서 등장인물들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어딘가를 향해 가는 신화 속의 인물들이다. 그들의 운명을 인도하는 것을 따질 겨를이 없다. 총소리와 대포소리, 정글의 동물들이 내는 소리와 내면적인 음악소리가 구분되지 않는다. 구분되지 않는 그 상태를 이 영화의 음악이 표현하고 있다. 감독의 부인인 카마인이 쓴 스코어에서 우리는 70년대 앰비언트의 가장 화려한 대목을 만날 수 있다. 당시 쓸 수 있는 아날로그 신시사이저 음색들의 정수가 담겨 있다.

끝. <The End>. 영화의 끝에 다시 <The End>가 흐른다. 말론 브랜도가 마틴 신에게 살해당하는 순간, 원주민들의 제의에서 번죄물로 뽑힌 소의 목이 날아간다. 그동안 흐르는 <The End>는 원주민들의 제의음악과 섞인다. 붓다의 잔해들이 머금은 미소는 그들의 죄를 용서하는 그걸까. 다 씻어 달래주려는 그걸까. 이 대목은 이 영화가 미국식 살풀이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러나 <…리덕스>판에서는 무릎꿇는 원주민들 앞에 무기를 놓는 마틴 신의 모습 속에서 어쩐지 얼굴을 바꿔 신자유주의로 지배를 이어가는 미국의 전략이 읽히는 게 좀 찜찜하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