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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으로 웃어볼까?
2001-08-30

쾌락의 급소찾기 38 - 가장 부조리한 만화는?

1980년대 중반이었다. 한국 문화인사들의 만찬에 감히 만화라는 메뉴가 올라가기에는 너무나 버거웠던 시절. 프랑스 만화가 모리스 앙리의 <동키호테의 탈출>이 <데생집>이라는 허울을 쓰고 출간돼 나왔다. 일본식의 스토리만화와 신문 카툰만을 만화로만 봐왔던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그것은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일찍이 만화의 예술성을 역설해냈던 문학평론가 김현이 서문에서 이 작품의 의미를 명쾌하게 분석해내고 있다.

그에 따르면 모리스 앙리는 그의 ‘초현실주의 친구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친구들이란 시인 자크 프레베르와 장 콕토, 화가 피카소와 막스 에른스트,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 소설가 알베르 카뮈, 부조리극의 대표 아라발 등 20세기 초반 세계인의 정신을 뒤흔든 대가들이었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을 만화의 파티에 초대한 앙리가 뿌려댄 웃음의 묘약은 다름 아닌 ‘부조리’였다. 일상의 논리를 철저하게 깨뜨려갔던 그의 만화는 그 시대 최고의 지성들한테 거대한 논리의 성곽이 부서지는 통쾌함을 선사했다. 모든 율법의 대명사인 법정에서 ‘기립’이라는 명령이 내려지지만 앉은뱅이는 일어날 수 없다. 이미 죽어버린 자들이 새로 목을 맨다. “저 친군 죽음에 아주 질렸어.” 도대체 무슨 뜻인지조차 알 수 없는 이야기. 그러나 그 역전된 논리의 부조리성을 깨달은 사람들은 통쾌하게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그곳에 가장 지적인 유머, 가장 지적인 만화가 있다.

부조리만화의 시작과 발전

부조리만화는 유럽과 남미의 카툰 세계에서 오래도록 발전해왔다. 하지만 일회적인 역설의 펀치로 상대를 절멸시키기보다는 굽이굽이 흐르는 이야기의 흐름으로 독자들을 동여매온 동아시아 만화에서도 부조리의 미학은 오랜 역사를 유지해오고 있다. 동아시아 이야기만화의 시원인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 속에서부터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부조리 장치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고대 역사물에서 갑자기 현대문물이 소품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만화가 자신이나 다른 작품의 만화주인공이 카메오로 출연하는 것도 어렵지 않게 보게 된다. 오늘날 일본과 한국만화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만나는 이러한 장치들은 데즈카의 초기 작품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최근에 국내에서 정식 발간된 <밀림의 왕자 레오> <블랙잭> 등에서도 그 예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데즈카는 만화라는 매체가 이러한 부조리의 유머를 실현시키기에 다른 어떤 예술보다 뛰어난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붓다>나 <불새> 같은 극단적으로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작품에서까지 이러한 장치를 빈번히 사용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 실없는 유머가 작품 전체의 진지성을 갉아먹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데즈카는 그것이 독자들로 하여금 ‘이것이 만화임을 인식’하게 하고, ‘지나치게 만화에 몰입하지 않도록 하는’ 수단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브레히트식의 소격효과를 노린 것이다.

부조리만화에 대한 인식이 좀더 분명해진 것은 1960년대 아카쓰카 후지오가 본격적인 장르로 개그만화를 만들어내면서부터다. 70년대 <호모호모 세븐> 등의 만화는 당시 스포츠 극화와 소녀만화에서 예외없이 등장했던 지나치게 진지한 주인공과 만화체의 어설픈 주인공을 동시에 배치하면서, 캐릭터의 형식 자체에서 극단적인 부조리를 만들어냈다. 부조리만화는 한동안 큰 유행을 타서 아즈마 히데오의 79년 작품에는 아예 <부조리 일기>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부조리만화는 몇 가지 영역으로 그 성격을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지극히 단순한 캐릭터, 순진무구한 생김새의 주인공을 등장시키면서 엽기적이고 가혹한 말과 행동을 일삼도록 하는 것이다. <우에본> <파타리로>의 3등신 주인공이나 <고양이 우동>에 등장하는 귀엽기 그지없는 고양이 가족이 그렇다(<짱구는 못말려>는 부조리만화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이러한 장치를 바탕에 깔고 있다).

두 번째는 패러디인데, 패러디의 부조리가 강화되기 위해서 원작은 유명하면 유명할수록, 진지하면 진지할수록, 그리고 정교하면 정교할수록 좋다. 그래야만 패러디의 파괴효과가 커지기 때문이다. 실험적인 패러디 부조리만화에는 SF를 패러디한 것이 많다. 그것은 SF 장르가 과학의 논리성에 기반하면서도 실제의 가능성을 넘어선 터무니없는 상상으로 넘어가는 부조리를 껴안고 있기 때문이다. 도리 미키의 이나 형제 만화가 가라사와 상회의 여러 작품에서 과학적 상식의 세계를 파괴하는 웃음의 다이너마이트들을 발견할 수 있다.

도리 미키는 90년대 이후 부조리만화의 논리적 핵심을 더욱 깊이 파고들어가고 있는데, 여기에서 부조리만화의 마지막 도달점인 순수 부조리의 세계가 펼쳐진다. <먼곳으로 가고파> 등에서 그가 만들어내는 유머는 3차원의 공간 구조를 깨뜨리고, 산수의 법칙을 위반하는 초수학 초과학의 부조리 속에 존재한다.

첫 발걸음을 떼는 국내 작품들

아직 국내에는 단순한 그림체와 극단적인 지적 실험이 결합된 부조리만화들이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 4칸만화의 강력한 부조리 전통을 이어받은 <보노보노> 정도에서 약간의 맛을 볼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우일의 최근작들 중 극단적으로 내용을 상쇄시키고, 형식적인 부조리 장치로 유머를 만들어내는 작품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존나깨군>이나 <작대기맨>, 그리고 무엇보다 <씨네21> ‘숏컷’에 등장하는 <아빠와 나>는 부조리만화의 한 맥으로 보기에 손색이 없다.

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중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