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슐츠의 <피너츠>, 에르제의 <틴틴>, 데즈카 오사무의 <철완아톰>. 미국, 프랑스, 일본에서는 부모가 자라면서 본 만화를 아이들이 본다. 부모가 본 만화를 아이가 보며 자연스럽게 세대간의 단절이 치유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그런 만화가 없었다. 조금 더 정확히, 그런 ‘만화’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런 ‘만화 환경’이, ‘만화 산업’이, ‘만화 출판’이 없었다. 출판사들은 매달 물량으로 만화를 밀어내기 바빴고, 대여점 중심의 총판 유통은 매일 쏟아지는 만화책에 소화불량이 되었다. 출판사들은 물류비용을 줄이기 위해 반품이 들어오기 시작한 책은 바로 덤핑에 들어갔다. 서점에서 독자에게 선택되는 상식적인 출판 마케팅과 유통 대신 대여점을 겨냥한 일회용 마케팅과 유통이 만화시장을 접수했다. 그러나 진리는 만화도 역시 ‘출판’이라는 소박한 기본이다. 이 소박한 기본이 갖추어졌을 때, 좋은 만화가 쇄를 거듭하며 출판되고, 세대를 이어 영속하는 풍경이 만들어진다. 내가 글을 깨우치면서 보기 시작한 만화를 내 아이가 글을 깨우치면서 다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상상. 2001년 8월, 그 꿈이 현실이 되었다.
어린이 눈높이의 투명인간
한국만화를 체계적으로 복원하는 만화프로젝트의 첫 번째 결실인 바다어린이만화 1차분으로 출판된 신문수의 <도깨비 감투>는 1973년, 성급한 아버지가 아직 글을 깨우치지도 못한 어린 아들에게 처음으로 사다준 <어깨동무>에 60쪽짜리 부록으로 연재된 작품이었다. 2년 동안 매월 부록으로 발행된 <도깨비 감투>는 1974년 연재 종료와 함께 어깨동무 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1년 전 나는 <도깨비 감투>를 통해 한글을 깨우쳤다.
<도깨비 감투>는 또래 어린이들이 공유하는 ‘투명인간’이라는 친근한 판타지를 기반으로 이야기를 풀어간 명랑만화다. 낡은 한옥에 사는 주인공 혁이는 천장에서 쥐가 시끄럽게 굴자 베개를 던진다. 베개를 너무 세게 던진 나머지 천장이 뚫어지고 감투와 책, 쥐가 떨어졌다. 혁이 감투를 주워 쓰고 거울을 보았는데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혁은 감투를 벗으면 보이고, 쓰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함께 떨어진 책을 통해 혁의 조상님이 238가지의 귀신과 싸워 이겨 수염이나 머리를 뽑은 뒤 그것으로 만든 감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다음날, 도깨비 감투를 쓰고 장난을 치다가 나쁜 일을 할 때는 감투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이때부터 혁이와 도깨비 감투의 모험은 시작된다.
쓰면 보이지 않게 되는 투명인간의 아이템인 도깨비 감투는 혁이의 모험을 끌어가는 모티브가 되었다. 투명인간을 모티브로 한 다른 작품들의 경우 보통 긴박한 서스펜스가 등장하지만, 명랑만화인 <도깨비 감투>에는 서스펜스의 긴박함보다는 친근한 일상과 판타지한 모험이 함께 공존한다. 외할아버지댁에 가 수박 과수원을 지키거나, 집안에 든 도둑을 잡고, 친구 삼촌 부대에서 마술공연을 하며, 자매결연한 섬의 축구팀을 돕는 등의 활약은 일상의 영역이다. 이 일상의 영역이 확대되면 밀수를 막고, 친구 아버지의 병을 구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떠나는 판타지한 모험의 영역이 된다. 독자들은 혁이의 활약을 자신의 활약으로 받아들였다.
‘투명인간’이라는 서스펜스한 모티브는 명랑만화라는 장르와 만나며 소년들의 명랑한 모험담이 되었다. 투명인간 모티브에 서스펜스를 강조하면 액션, 추리 장르로 진화하지만, ‘명랑’을 강조해 <도깨비 감투>가 된 것이다. 명랑만화의 핵심은 어린 독자들과 맞춘 눈높이다. 명랑만화는 다른 어떤 장르보다 빠르게 어린 독자들과 소통한다. 소통의 핵심은 간단한 선을 통해 표현되는 시각정보의 간결함과 일상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에 기반한 서사의 전개다. 가장 빼어난 시각적 상징화를 보여주는 명랑만화는 만화의 원리에 가장 가까운 장르이기도 하다. 80년 중반 이후 그 많던 명랑만화가 이 땅에서 사라졌지만, 아직도 명랑만화에서 영향을 받은 여러 작품들이 대중의 인기를 끌고 있다. 박광수의 <광수생각>, 김재인의 <마시마로의 숲이야기> 등이 모두 명랑만화의 계통수에 존재하는 작품들이다.
추억도 복원해드립니다
이번에 복간된 <도깨비 감투>는 박수동과 함께 가장 독특하면서도 여유있는 선을 보여주는 신문수의 초기 화풍을 볼 수 있다. 소박하면서도 기본기에 충실한 초기 작화는 교과서 빈 곳에 위치한 바로 그 그림이다. 일상과 모험이 공존하는 만화, 하지만 모두에게 따뜻한 정이 흐르는 만화. 한 세대를 넘어 다시 우리 앞에 선 만화. <도깨비 감투>는 혹시 28년 동안 도깨비 감투를 쓰고 있다가 갑자기 우리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아닐까?
2001년 8월15일. 오후 3시 SICAF 2001 행사장. <꺼벙이>의 길창덕, 의 박수동, <철인 캉타우>의 이정문, <도깨비 감투>의 신문수 선생님의 사인회가 열렸다. 부모들이 아이의 손을 잡고 책을 들고 사인을 받았다. 아이들은 부모가 사준 책을 읽으며 웃고 있었다. 변화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2001년 한국만화는 변화할 것이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