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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음악 <소름>
2001-08-16

일상의 낯선 얼굴을 보라

<소름>의 아파트 공간은 언뜻 보기에는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것 같지만 실은 아주 비일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공간이다. 그런 면에서는 카프카의 공간 설정과 정반대이다. 카프카는 언뜻 보기에는 비일상적이지만 실은 무섭도록 현실적인 공간을 종종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건 그 공간의 메커니즘을 누가, 무엇이 지배하느냐에 따라 갈리기도 한다. <소름>의 공간은 어떤 지적인 설계사의 산물이다. 작가로 등장하는 사람의 존재가 그 공간의 맨 밑바닥에 있는 동력을 암시한다. 그에 반해 카프카의 비현실적인 공간은, 예를 들어 <심판>의 법정 같은 경우,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비현실적이지만 그 메커니즘은 현실 그 자체이다.

<소름>이 기획하고 있는 것은 구차한 일상의 포장을 일단 제시한 다음 그것을 뜯어낸 이후에 드러나는, 우리 일상의 본질적인, 잔인한 낯섦/비현실성에 대한 폭로이다. 특히 이 영화의 사운드 디자인은 그러한 기획을 잘 받쳐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실내/실외의 의도적인 혼동이다. 예를 들어 아파트 내부를 비춰주는 화면에서, 실내의 소음들 이외에 시냇물소리 비슷한 소리가 끊임없이 흐른다. 나중에 그 소리는 빗소리인 것으로 판명이 나지만 실외로의 장면 이동을 통해 빗소리라는 것이 판명나기 전까지 그 빗소리는 실내라는 공간에 이질적으로 작용함으로써 그 공간을 현실적인 것에서 비현실적인 것으로 옮겨놓는 작용을 한다. 빗소리는 마치 체액이 흐르는 소리같이 들리기도 하고 무의식의 저변에 흐르는 죽음의 물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식으로 심리적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지직…거리며 흐르는 전기소리 비슷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때로는 불타오르는 소리로까지 확대되는 그 소리는 다소 과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결국은 그 공간의 비현실성을 위해 마찬가지로 봉사한다. 사운드 디자이너는 다중채널의 입체성을 효과적으로 살리고 있다. 그 비현실적인 소리들을 왼쪽/오른쪽, 앞/뒤의 어디엔가 숨김으로써 공간과 심리가 입체화된다.

이 영화는 음악 사용에 매우 인색하다. 음악을 쓴다고 해도 거의 효과음과 동일한 차원에서 기능시킨다. 바로 그 점이 성공적이다. 예를 들어 여자주인공이 남자주인공의 신발끈을 매주는 장면에서, 보통 같았으면 서정적인 음악이 흐르기가 십상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멀리서 지나가는 비행기소리로 그 음악을 대신하고 있다. 비현실적인 비행기소리는 먼 과거에 관한 어떤 파편적인 기억이기도 하고 시간의 재빠른 흐름과 단절이기도 하고 심리적인 선긋기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는 여러 차례, 이런 식으로 효과음이 적절하게 음악을 대신하는 장면을 만날 수 있다.

그와 반대로 효과음이나 소음 같은 것이 들어갈 자리에 음악을 배치한 경우도 보인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피아노소리이다. 사실 이 영화에 나오는 음악의 80%는 그 피아노소리이다. 재개발을 눈앞에 둔 아파트에 어린이를 위한 피아노 교습소가 차려져 있는 비현실적인 설정은 지적인 설계의 산물인데, 거기서 흐르는 피아노소리는 유년기에 관한 신경증적인 암시들이다. 다른 음악에 비해 과다하게 배치된 피아노소리는, 영화가 품고 있는 원형적인 신경증, 내러티브의 섬세한 배치와 너무도 상관없이 둔탁하게 여주인공의 죽음을 덜커덕 제시하는 주원인이 되기도 하는 신경증을 관객에게 조금 신경질적으로 전파하기 위한 수단이다. 박정호와 윤민화가 맡은 스코어도 수작에 속한다. 메인 타이틀, 사랑의 테마, 엔딩 테마, 이렇게 단출하게 마련된 자리를 아주 단단하게 메우고 있다. 파르르 떨리는 바이올린과 어루만지듯 울리는 기타 선율이 광기와 따뜻함을 같이 품으며 들려준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