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당신이 그릴 수 있는 주인공이 하나라면, 영웅물을 먼저 생각하라. <신의 아들>이나 <고독한 기타맨>처럼 특별한 재능의 주인공을 내세워 그들이 독자들을 압도하게 만들어라. <스바루>나 <블랙잭>처럼 주인공의 이름을 제목으로 써도 좋다. 그럴수록 카리스마가 철철 넘친다. 두세명의 메인 캐릭터라면 연애물이 어떨까? 둘로도 아기자기한 사건들을 끌어낼 수 있지만, 역시 삼각관계 이상이 되어야 꼬이고 풀리며 연애의 감칠맛이 살아난다. 그런데 정말로 그려보고 싶은 주인공이 5, 6명을 넘어간다면, 그들 모두 제 목소리를 한번 더 내려고 발버둥친다면, 그때는 개그만화가 적당하다. 매회 난데없는 등장인물이 나타나고, 주인공들의 대사가 칸을 넘치고, 사건은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고, 만화가 스스로도 어떻게 끝을 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처하더라도, 그 혼란스러움이 무참한 웃음의 파티를 만들어낼 것이다.
코믹과 액션의 종합선물세트
만화의 제목부터 다카하시 류미코의 <시끌별 녀석들>과 황미나의 <웍더글 덕더글>은 가장 왁자지껄한 만화의 후보로 오르기에 손색이 없다. 우리에겐 <우루세이 야츠라>라는 일본명의 애니메이션으로 좀더 잘 알려진 <시끌별 녀석들>. 세상에서 제일 재수없는 관상을 타고난 모로보시에게 어느날 외계에서 온 소녀 라무가 구애를 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되는데, 기본 등장인물들도 워낙 말이 많은데다가 매번 등장하는 새로운 인물들도 각자 폼을 잡아보려고 덤벼드는 통에 항상 이야기는 시끌벅적 롤러코스터를 탄다. 다카하시의 후속작인 <란마 1/2>에서도 이러한 전략은 이어져서 마치 80년대 홍콩영화를 보듯이 코믹과 액션이 뒤범벅된다.
이 왁자지껄 만화의 중심은 이야기가 아니라 인물들인데, 그 인물들 공통의 특징은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고 나아가 이기적이라는 데 있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꼭 하고, 아무리 말려도 하고 싶은 짓은 또 하고 만다. 라무는 온몸을 던져 모로보시를 껴안고, 제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전기충격으로 응징한다. 스님 체리는 듣는 사람의 기분은 생각지도 않고 재수없다는 말을 내뱉고, 라무를 좋아하는 레이는 거대한 소와 인간을 오고가는 지극한 단순함을 과시한다. 그 좁은 페이지에 수백명의 외계인과 요괴가 군중 신을 펼치는 대소동이 벌어지지만, 그래도 세상이 붕괴되지 않고 유지되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다. 끼아아악, 비명이 들린다. “어머 또 모로보시군이네요.” 아줌마들은 뭐 별일도 아니라는 듯 저녁 밥상을 차린다.
황미나의 <웍더글 덕더글>에는 대가족의 일원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집안에서부터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는 칠남매가 등장한다. 군인 출신 아버지 덕분에 모두가 격투기의 달인이고, 웬만한 집안일은 폭력으로 해결한다. 예쁘장한 막내 여학생조차 가족들의 뻔뻔한 유전자 덕분에 딸꾹질을 거대한 트림으로 발산할 정도로 비극의 상황이다. 주변에서 볼 때는 항상 일촉즉발의 상태로 보이지만, 묘하게도 평화로운 질서가 지배하고 있다. 그것은 <시끌별 녀석들>에서는 볼 수 없는 끈적끈적한 가족간의 애정 때문이다. <웍더글 덕더글>에는 제멋대로 행동하는 듯하면서도 지킬 건 지킨다는 ‘박카스’의 유교 정신이 깃들어 있다. 황미나의 또다른 대소동집단코미디 <슈퍼 트리오>에선 어느 정도 이런 도덕률이나 교훈적 요소가 약해지지만, 그래도 스스로를 규제하는 정신은 존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카하시 류미코와 같은 완전한 무책임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닥터 스크루>와 <헤븐>의 사사키 노리코 역시 왁자지껄의 쾌락을 아는 만화가이다. <닥터 스크루>에서 모든 일에 냉담한 여선배와 아프리카 가면이나 쓰고 다니는 제멋대로 노교수와 인간보다 더한 성격의 동물들을 내세워 짭짤한 재미를 봤던 사사키. <헤븐>에 와서는 규모가 축소된 듯도 하지만, 이 식당의 종업원들도 한바탕 사건이 벌어질 때는 도대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개성들을 보유하고 있다. 두 만화 공통의 축은 생명을 다루는 병원이든, 예의와 분위기를 소중히 여기는 프랑스 레스토랑이든, 기본적으로 질서와 평온함이 유지되어야 하는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공간을 구성하는 인물들 중 핵심의 한둘은 도무지 그 질서를 유지할 만한 능력이 없어보이고, 외부의 돌발적인 사건들도 호시탐탐 그 불안한 질서를 잠식해올 기회를 노린다. 사건의 풍랑은 몰아치고 이 배는 언제 전복될지 모른다. 그러나 기묘하게 개인의 장점과 단점들이 퍼즐처럼 맞아들어가며 배는 위기를 벗어난다. 우리는 그 부조화의 소동을 호쾌한 웃음으로 즐기며 만화 동산의 바이킹 놀이배가 제자리에 돌아가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삶의 카오스에 맞춰 춤을!
무책임하고 약점 많은 인물들이 얽히고 설키면서 혼돈의 파티를 만들어내는 또다른 장면들은 이마 이치코의 <어른의 문제> <키다리 아저씨들의 행방> <게임> 등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왠지 달짝지근한 미소년 동성애의 분위기를 풍기는 만화들이 하나둘 인물들을 증식해가면서 한두번 읽어서는 독해가 불가능한 산만신경계의 코미디로 전화해간다. 멜로디 라인을 해석하고 따라가는 것보다는 그냥 비트에 맞춰 고개를 흔들다가, 그루브가 느껴지면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 더욱 어울리는 만화들이다. 여성만화가들이 더욱 빛을 발하는 정신없는 수다와 사이키델릭한 춤의 세계다.
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중 www.sugarsp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