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있는 작품이 다시 제작되는 것은 생소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 만화나 애니메이션업계에서 희망을 거는 작품들 중에는 ‘리바이벌’풍의 작품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국내에서는 90년대 한국만화업계의 시장규모를 바꾸어버린 <드래곤 볼>과 <슬램덩크>(일본에서도 컬러 페이지가 추가돼 재출간됐다) 같은 작품이 최근 ‘무삭제판’과 ‘완전판’이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달고 재출간되고,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적게는 10년부터 많게는 40여년이 지난 캐릭터들을 부활시켜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를 계속 제작하고 있다. 디즈니의 <판타지아 2000>이나 <피터팬>, 일본의 <자이언트 로보> 같은 작품은 다 그런 ‘리바이벌’ 현상이 낳은 작품들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한국 작품으로 인식하고 있을 정도로 인기를 누린 일본 작품 <마징가 Z>(1972), <그레이트 마징가>(1974), <그랜다이저>(1975)로 이어지는 ‘마징가 시리즈’ 역시, 30여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올해 9월경 판매용 애니메이션 비디오(OVA·Original Video Animation)로 나온다는 소식이 들리고 있다. <마징카이저>란 제목으로 알려진 이 작품은 총 7부작으로 만들어질 시리즈물. <마징카이저>는 원래 1980년대 중반에 진행됐던 ‘마징가 Z 부활프로젝트’ <대마징가> 기획의 후신이랄 수 있다. 기획중에 무산된 <대마징가>는, <대마수격투 강의귀>(1987)와 <파사대성 당가이오>(1987)라는 2편의 OVA로 바뀌어 제작됐다. 하지만 10여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기획이 다시 진행되면서 <마징카이저>로 살아난 것. <마징카이저>는 72년작 <마징거 Z>와 ‘나가이 고’ 원작의 이미지에서 맞춰 제작 중이며, 국내에 ‘쇠돌이’라고 소개된 ‘가부토 코우지’나 ‘애리’였던 ‘유미 사야카’같은 주인공들은 물론 ‘헬 박사’ 등 악역까지 기존의 캐릭터들이 총동원되어 등장하고 있다. 1편의 주 스토리는 과거 <마징거Z>의 마지막 편이었던 <마징거 Z 대 암흑대장군>과 유사해 기계수에게 탈취당하려는 순간 신메카 ‘마징카이져’가 나타나는 줄거리로 구성된다고 한다. 이런 기획이 다시 진행된 배경에는, 무엇보다 90년대 후반 초히트 상품이었던 게임 <슈퍼로봇대전> 시리즈의 인기가 가장 큰 힘이 되어줬다. 하지만 그뿐이 아니다. 그 밖에도 ‘원판 만화의 꾸준한 재출간’, ‘주기적인 TV 방영 및 판매용 소프트 출시’와 같은 노력의 축척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징가 Z> 시리즈를 <마징카이저>로 새롭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지만, 한편 지난해 마니아들 사이의 최고의 기대작이었던 ‘태권 V 부활 프로젝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여기저기서 기획되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던 ‘태권 V 부활 프로젝트’는 어느새 다시 수면 밑으로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이제 국내에서도 각종 애니메이션의 인형, 키홀더, 휴대폰줄 등의 캐릭터상품이나 만화책을 구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됐지만, <태권 V>는 캐릭터상품이나 비디오는커녕 만화책조차 귀해 골동품점에서나 겨우 볼 수 있는 지경이다.
문제는 향유층의 아이들의 수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 비해, 만화 ·애니메이션업계의 대처가 단편적이고 지엽적인 부분에 치우쳐 있다는 것이다. 만화책의 판매량이 줄자 ‘대여점’을 주소비구역으로 정해버리는 우를 범해 전체적인 시장규모의 성장을 막고, 적절한 마케팅 기획이나 주변환경의 분석없이 뛰어든 애니메이션들이 수차례 고배를 마시며 여러 가지 족쇄 아닌 족쇄를 만들어냈다. 더욱이 인터넷, 게임, 모바일 등과 같은 신흥 콘텐츠산업시장으로 많은 인력들이 빠져나가면서, 갈수록 ‘진짜 푹 빠져 좋아하고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기가 힘들어지고 있다. 고전 작품들의 부활이 시장을 주도하는 것 역시 그리 좋은 시장 환경이라고 할 순 없지만, 이같은 위기 상황에서 다음 시장에 대한 토양을 만들어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재도약을 준비할 수 있는 ‘리바이벌’, ‘향수’(鄕愁) 마켓에서조차 국내 작품의 비율이 미미한 것이다.
기초과학이 부실하면 첨단과학이 발달할 수 없듯이, 지금 운동경기장에서 응원가로 부르고 있는 <마징가 Z>나 <그렌다이저> 주제가가 10년 뒤에 <포케몬>이나 <디지몬> 주제가로 이어진다면 우리 어릴 적 추억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했던 국산만화나 애니메이션들은 ‘유물’이나 ‘전설’로만 남아 있게 돼버리지 않을까. 만화나 애니메이션은 대중문화 상품이다. 되도록 많은 사람이 향유하고, 다음 세대에도 전해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그 작품에 진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길일 것이다. 아이들에게 유리장 속에 낡은 표지만 보이는 전시물을 보여주면서 예전의 추억을 이해하라는 것은 한계가 있으니 말이다. 부디 <태권 V>가 <이제는 말할 수 있다>나 <역사스페셜> 같은 TV프로그램의 소재가 되지 않기를, <마징가 Z>처럼 부활할 수 있는 기반을 다져갈 수 있기를 바란다.
김세준/ 만화 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