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자와 아이의 <나나>는 매력적인 설정의 만화다. 귀엽지만 평범한 소녀가 무턱대고 동경에 올라와, 그와 같은 이름의 여자아이와 동거 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몇 가지 우연이 개입되지만, 그럭저럭 봐 줄 만하다. 누군들 청운의 꿈을 품고 도시에 올라와 갖은 고생을 해보지 않았을까? 그런 불쌍한 청춘들에게 약간의 행운 정도야 오히려 내가 신들에게 부탁해볼 정도지.
만화 속에서라도 꿈꿔보자
그런데 그 행운을 읊어볼까? 돈이 없는 나나가 제대로 된 방을 못 구해 겨우 찾아낸 것은 클래식한 서구형 빌딩의 전망 좋은 7층 방, 약점이라고는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점(그런데도 계단을 낑낑거리며 올라가는 장면 하나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월세가 조금 비싸 고민하고 있었는데, 기차에서 만난 같은 이름의 여자아이가 마침 그 방을 보러 와 있었고, 복덕방 할아버지의 제안으로 함께 방을 빌려쓰기로 한다. 물론 방의 구조도 각자의 독립된 방이 같은 크기로 되어 있고, 가운데는 공동의 거실이 준비되어 있다. 이삿짐은 달랑 짐 몇개, 하지만 남의 뒤치다꺼리 해주길 좋아하는 변호사 친구가 갖가지 부산스런 일을 처리해 준다. “그래도 가구는 직접 살 거야.” 그래, 스스로 하는 즐거움도 있어야지. 그래서 길거리에 나가니 어디서 기다렸는지, 멋진 중고 가구점이 튀어나온다. 가구점의 주인은 너무 멋진 미남자이고, 50, 60년대의 멋들어진 냉장고와 세탁기를 모두 깨끗이 수리해서 판매한다. 고풍스런 물건이니 좀 비싸겠지? 천만에 “내가 직접 유럽에서 가져온 거라” 헐값으로 판매한단다. 이것은 어떻게 등장한 ‘자선사업형’ 경제학인가? 유럽에서 공수해온 운송비와 관세는 어떻게 하고? 조금 더 나가보자. 물건은 당연히 친절하게 배달해주고, 그런데 웬일로 한 가지 단서가 붙는다. “직원이 지금 없으니 저녁에 내 차로 배달해줄게.” “어머나, 직원이 없다구요?” 나나는 당장에 이력서를 꺼내들고 일자리를 마련한다. 멋진 동경 인생의 시작이다.
지금도 여러 작가들이 만화의 리얼리티를 높이기 위해 방대한 자료를 찾고 꼼꼼히 컨설팅을 받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만화들이 뜻밖의 행운을 당연한 장치로 꺼내 쓰고 있다. 리얼리티의 감동 이상으로 독자의 꿈을 대리 충족시켜주어야 할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다. 뭐 그것에 그렇게 딴죽을 걸고 싶지는 않다. 다만 정도가 심하면 독자들도 배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대충대충, 달콤한 무사태평주의
고행석의 <불청객> 시리즈는 언제나 괴상망측한 행운들이 난무하는 만화다. 주인공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가운데 행운들이 그를 도와주고, 세계를 주름잡는 기업가로 만인을 흥분시키는 스포츠 스타로 등극하게 해준다. 가끔은 갈고 닦은 능력들이 발휘되는데 그것은 탁구를 칠 때 기가 막히게 네트에 맞고 살짝 상대방 테이블로 넘어가거나, 테이블 끝 부분에 맞고 피식 공이 떨어지게 하는 기술이다. 남들은 한 게임에 한번 얻어볼까말까한 행운을 스스로 제조해내는 탁월한 기술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가모우 히로시의 <떴다, 럭키 맨>은 한술 더 뜬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세번쯤 깨지는 세계에서 가장 재수없는 소년 왕재수, 하지만 럭키맨으로 변신만 하면 어떤 일이든 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바뀌어버리는 기막힌 행운을 얻게 된다. 그의 행운은 지구를 넘어 전 우주의 사건들에까지 영향을 끼치는데, 뭐 어떠랴, 아무렇게나 해도 행운의 신이 모든 것을 처리해줄 텐데.
불청객이나 럭키맨 같은 대책없는 행운아들을 보다보면 “뭐 신경 쓰지 말자. 인생은 대충 어떻게 해도 잘되겠지” 하는 달콤한 무사태평주의에 젖게 된다. 어떤가, 아무래도 좀 문제가 되겠지? “아니 뭐 만화 속 일인데 어때, 현실과 혼동하는 경우는 없겠지. 만화 속에서라도 수십억짜리 복권에 당첨되고, 익사 직전의 미녀에게 마우스 투 마우스 인공호흡을 해봐야지. 인터넷에 떠다니는 그 수많은 자동차와 아파트 사은품들, 언제 당신 손에 한번 쥐어본 적 있어?” 하며 나 역시 무사태평하게 넘어가 본다. 괜히 행운의 신이 하는 일에 시비를 걸었다가, 아직 내게 남아 있는 행운 쿠폰까지 압수당할지 모르니.
너의 행운, 나의 고통
그런데 만약 말이다. 그 행운이라는 것이 말이다. 내가 아니라, 내가 죽여버리고 싶도록 싫기만 한 상대방에게 계속 일어난다면 어떨까? 그 지독한 불행을 나는 어떻게 감내할 것인가? 유쾌한 패륜 개그만화 <시어머니 죽이기>에는 시어머니를 죽이고 싶어 안달하는 며느리와 끝끝내 살아나고 마는 시어머니가 나온다. 그들의 공격과 방어는 너무나 습관적이어서, 아무리 잔혹한 살인행각도 한판의 게임 정도로밖에 안 보인다. 딸꾹질을 하는 어머니에게 도끼를 들이대고 한바탕 살인극을 펼치는 며느리, 나중엔 포기하며 헐떡대고 말한다. “놀라게 하면 딸꾹질이 멈춘다고 하더라구요.” 시어머니도 지지 않는다. “휴, 간 떨어질 뻔했구나. 덕분에 딸꾹질이 완전히 멎었지 뭐냐?” 게다가 더욱 막강한 시아버지도 등장한다. 목욕하라며 뜨거운 물에 얼굴을 처박으면 그 물을 다 마셔버리는 시아버지. 동물원의 곰 우리에 떨어뜨리면 곰에게 치료를 받는 시아버지. 심지어 부처님이 보고 싶다고 해서 목을 졸라 죽였더니 부처님의 사인을 받아 돌아오는 시아버지. 정말 그 행운에 두손을 들어야 한다. 모든 만화의 악역들은 언제나 그런 운명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만화가시여, 당신은 왜 저런 무책임한 행운을 주인공에게 주셨나이까?
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중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