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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적 시선
2001-07-18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O.S.T

2001년이 된 지금, 큐브릭이 꿈꾼, 우주에 나간 아빠가 딸한테 일상적인 애정이 담긴 메시지를 보내는 세상은 오지 않았다. 그의 상상은 미래에 관한 한 빗나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영화를 볼 때 도리어 빛나는 것은 과거에 대한 그의 관점이다.

이 영화에 관한 한, 그는 인류의 역사를 변증법적인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과거 우리나라의 어느 보일러 선전에서도 차용되었던 유명한 뼈다귀 던지는 장면과 우주선의 유영으로 이어지는 장면의 연속은 그저 연속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역사를 통해 드러나는 어느 변증법적인 행위들의 고통스러운 좌충우돌의 시퀀스인 것이다.

스탠리 큐브릭은 이 영화에서 마치 인류가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우주선까지 가게 된 그 (근대적인 관점에서는) 위대하고도 잔인한 역사적 이정표들의 음악적인 대응항들을 찾듯, 음악을 고른다. 그렇게 해서 고른 첫 음악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다.

이 음악은 위대하고도 잔인한 음악이다. 알려진 대로 리하트르 슈트라우스는 반음계화성의 최후의 계승자이다. 따라서 바그너의 최후의 제자라고도 할 수 있는데, 위대한 게르만의 역사적 발전을 음악적으로 계승한 그는 운명적으로 나치즘에 충실하게 복무한 사람이다. 그 음악은 몹시도 변증법적이다. 처음에 한 뼈다귀부터 시작한 어떤 행위가 결국 우주를 유영하는 기지로까지 가게 된다.

<짜라투스트라>의 처음에 흐르는 웅장한 파이프오르간의 저음은 자그마한 발견도 아직 없었을 태초의 묵묵한 시간의 흐름을 재현한다. 그러다가 해가 뜨기 시작하듯, 천천히 브라스가 나오기 시작한다. 그것은 당당하면서도 비극적인 팀파니로 이어지고, 그 비극성 자체로 힘을 얻어 브라스는 일종의 예찬에 가까운 팡파레가 된다. 그래서 그 팡파레는 잔인한 팡파르이다.

뼈다귀의 발견에서 시작된 어떤 살의, 살인에 살인을 거쳐 결국에 우주유영에 이르게 된 인류의 피어린 살해행위들을(우주 유영은 일종의 꿈의 살해 아닌가) 이 음악은 잔인하리만치 정교하게 음악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스탠리 큐브릭의 변증법과 정통 마르크시스트의 그것이 갈라선다. 그는 기본적으로 ‘비관적’이다.

그 시퀀스가 끝난 뒤, 우주를 떠도는 기지들의 춤이 이어진다. 영화사상 가장 인상적인 음악/영상의 결합 중 하나를 그 ‘기지들의 춤’을 통해 맛볼 수 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아니라 이번엔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 <푸른 다뉴브 강>이 흐른다. 이 장면은 매우 정적이면서도 역동적이다. 우주선들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움직이고 있다. 그냥 멈춰진 시선 속에서 그들의 움직임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요새 같으면 ‘크레인’을 쓴 것처럼, 시선 자체가 움직이며 동시에 움직이는 물체를 본다. 우주선 하나가 이쪽으로 다가온다. 그 다가옴을 보는 우주선은 저리로 간다. 그리고 그 저쪽에 또다른 우주선이 있다. 음악의 박자는 3박자이다. 그 춤은 결국에는 변증법적인 춤이 되는 것이다. 우주선의 춤과 3박자의 왈츠와 변증법의 결합. 그 세 항목의 결합은 여전히 인류의 역사를 진보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스탠리 큐브릭은 이 대목에서 다시 정통 맑시스트와 어깨동무를 한다.

최근에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가 DVD 전집으로 출시되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의 영화들을 섬세한 화면과 오디오를 통해 다시 보는 일은 여러 가지로 중요해 보인다. 또 그가 만들다가 스필버그에게 토스한 영화인 에 관한 소식도 들린다.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다시 보면서, 1960년대라는 ‘근대의 정점’을 산 인간들이 품고 있던 변증법적인 역사관을 음악적으로 음미하는 일도 흥미로운 일이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