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식 정원 살인사건> O.S.T
피터 그리너웨이는 풍부한 알레고리와 상징을 화려한 색감 속에 품고 있어서 늘 다양한 방식으로 읽힐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알레고리는 자주 ‘죽음의 알레고리’이다. 그래서 매번 엽기적이기도 한데, 그의 대중적 출세작인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도 마찬가지이다. 이 영화는 ‘보다’(see)의 영화이다. 더 정확히는 ‘보다’의 비극성을 그리고 있는 영화이다. 그래서 그것은 영화의 운명이라 할 수 있는 ‘재현의 욕망’이 가지고 있는 비극성을 자기 거울에 되비춰보고 있다. 사람을 제거한 철저한 대상으로서 풍경을 대하는 데생 화가 네빌의 눈에 비친 어느 정원 속에 ‘음모’가 보인다. 그는 그 음모를 재현한다. 이야기는 이렇게 간단명쾌하다. 그래서 결국 그는 죽음을 맞이할 운명에 처하는데, 영국식 정원의 자연적 풍광 속에 ‘보이는’ 음모의 시작은 권태이고, 그 권태는 끝없이 상속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귀족들의 것이다.
피터 그리너웨이는 이러한 내러티브를 무겁지 않고 가볍게, 시니컬하게 가져간다. 이 영화는 일종의 블랙코미디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귀족들의 장난일 뿐이다. 그래서 ‘디베르티멘토’(divertimento)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실내악 형식을 가리키기도 하는 이 말은 ‘여흥’의 뜻이지만, 어감상 귀족들의 노리개라는 느낌이 강하다. 서양음악사에서 디베르티멘토가 꽃피는 건 18세기 중후반이니까 사실 17세기 말엽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의 시대와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 17세기 말엽은 초기 바로크 시기로, 헨델의 영국에서의 활약을 보려 해도 몇십년은 더 기다려야 할 시기이다. 그러나 어쨌든 영화는 디베르티멘토적인 느낌을 좀더 강화한 바로크적 대위법 선율을 차용한 음악으로 가고 있다. 음악을 맡은 마이클 니만은 초기 바로크 시절의 영국 작곡가인 헨리 퍼셀의 잘 알려지지 않은 선율들을 바탕으로 특유의 시니컬한 블랙코미디적 디베르티멘토를 만들었다. 헨리 퍼셀은 1707년 이탈리아 오페라가 영국에 쇄도하기 전까지 군림했던 영국 최대의 바로크 작곡가이다. 그는 특히 이미 나와 있는 노래말에 곡을 붙이는 능력이 탁월하여 궁정이나 기타 귀족들의 오락용으로 수많은 노래들을 남겼다. 마이클 니만이 차용한 멜로디들은 그 노래들의 것이다.
그리너웨이의 단골손님인 마이클 니만은 영화음악 작곡가 이외에도 ‘전위음악가’의 딱지가 붙어 있는 사람이다. 유명한 ‘마이클 니만 밴드’가 펼쳐내는 음악세계는 이 사람의 영화음악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방대한 영역을 포괄하고 있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전통적인 유럽 고전음악적 전통을 존 케이지 등의 신흥 아방가르드음악과 섞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 영화의 음악에서도 약간은 그렇다. 기본적으로는 헨리 퍼셀이 활약하던 시기에 자주 보이는 이른바 ‘고집저음’, 즉 바소 오스티나토(basso ostinato)를 중심으로 음악이 움직인다. 고집저음이란 13세기 프랑스의 모테트에서부터 즐겨 쓰이던, 최하성부에 지속적으로 반복하여 나타나는 선율을 말한다. 따라서 관점에 따라서는 매우 미니멀한 느낌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 미니멀리즘을 마이클 니만은 현대의 미니멀리즘적인 전위의 시선에서 다시 이용하고 있다. 때로 그 고집저음은 약간은 재즈적인 ‘워킹 베이스’(walking bass: 재즈 베이시스트들이 자주 쓰는, 걸어가듯 리듬을 타는 4비트 주법)를 연상시킨다. 그러한 현대적인 느낌은 고전적인 음악에 거의 영국 특유의 보드빌풍 브라스밴드의 익살을 불어넣는 노릇을 한다. 그래서 더없이 냉소적인 분위기가 생기는 것이다. 마이클 니만의 이러한 음악적 접근법은 피터 그리너웨이가 허구한날 17세기를 그리면서도 거기서 영화의 근본문제에 관한 질문을 혁신적으로 던지는 것과 아주 잘 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