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분야가 다 마찬가지지만, 애니메이션도 그동안 남성 중심의 예술분야였다. 일단 남성에 비해 활동하는 여성 작가 수가 적었고, 그만큼 사람들의 머리 속에 남는 작품도 많지 않았다. 이제는 과거에 비해 꽤 많은 여성 작가들이 현역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아직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작가는 남성들이 많다. 특히 상업적인 성공과 언론의 주목을 동시에 거둘 수 있는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에서 여성감독은 거의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것이 애니메이션이란 분야에서 남성의 차별적 우월성을 상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늘 이야기되는 것이지만, 사회·경제적으로 오랜 세월 굳어져온 남성 중심의 가치관이 애니메이션을 평가하는데 투영됐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동안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한 애니메이션 작가 중 여성을 꼽아보니 캐롤라인 리프와 지난주에 소개했던 앨리슨 드 비어밖에 없다. 결국 이런 말을 하는 필자도 남성우월주의 가치관에서 전혀 자유롭지 않았던 셈이다. 굳이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평가하지 않더라도 최근 애니메이션계에는 주목받는 여성 작가들이 많다. 앨리슨 드 비어나 모니크 르노처럼 오랜 세월 꾸준히 활동하고 있는 베테랑이 있는가 하면, 조아나 퀸이나 사라 와트처럼 90년대 들어 주목을 받는 신성도 있다. 그동안의 편향된 시각을 반성하는 의미에서 이번에는 애니메이션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여성 작가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중 먼저 소개하고 싶은 인물은 수잔 영이다. 영국 애니메이션 작가 중 비교적 소장파에 속하는 그녀는 85년 <카니벌>이란 작품으로 정말 혜성같이 등장했다. 64년생이니 당시 그녀 나이는 21살. 패기 넘친 예술학교의 학생이던 그녀는 그래픽아트풍의 현란한 그림과 힘이 넘치는 움직임으로 주목을 받았다. 특히 경쾌한 트로피칼 리듬에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화면 템포는 보는 이를 경탄케 했다. 주로 열대지방의 정열적이고 밝은 음악을 작품에 즐겨 사용했던 그녀는 92년에는 지미 헨드릭스 음악에서 모티브를 딴 <불>(Fire)을 발표했다. 지미 헨드릭스의 몬테레이 팝 페스티벌 연주 모습을 로토스코핑으로 처리한 영상에 기타 선율이 지닌 에너지와 관능성을 시각적 이미지로 표현한 애니메이션이 어우러지면서 그녀 특유의 힘과 리듬감이 돋보이는 가작이 됐다. 94년 자신의 독립 프로덕션을 세운 수잔 영은 현재 광고와 TV 작품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언젠가 이 지면을 통해 오페라 아리아와 애니메이션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진 <오페라 이마지나리아>란 작품을 소개한 적이 있다. 라이문드 크루메를 소개할 때 언급한 애니메이션 모음집인데, 이 영상 프로젝트에 참여한 작가 중 모니크 르노가 있다. 네덜란드에서 활동중인 그녀는 원래 프랑스에서 태어나 60년대 파리 국립예술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모니크 르노는 70년대 초반부터 활동을 한 중견 작가이다. 73년부터 75년까지는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최초로 시도한 작가로 꼽히는 피에르 폴테즈와 여러 작품을 함께 만들었다. 그녀를 유명하게 만든 작품은 88년 발표한 <파 사 두>(Pas a deux). 제리 반 디직과 함께 만든 이 작품은 성과 대중문화의 각종 코드, 그리고 성 정체성을 담고 있는 꽤 시니컬한 작품이다. 처음 경쾌하게 댄스 클럽에서 춤추는 남녀가 등장하는데 두 사람은 음악의 변화에 앞서 브리지트 바르도, 뽀빠이, 성적 매력 넘친 선원, 베티 붑, 프레드 아스테어, 미키 마우스, 존 웨인, 자유의 여신상, 성모 마리아, 슈퍼맨, 교황, 땡땡(벨기에 인기만화의 주인공), 미스 피기 등 각종 캐릭터로 현란하게 바뀐다. 정신없이 바뀌는 각각의 인물들은 종교와 정치, 남성들의 마초이즘과 소영웅주의, 미국의 서부극이 가진 맹목적 제국주의, 그리고 종교의 신성함과 그에 반하는 위악적인 비속함 등이 어울려 현대문화에 대한 큰 담론을 이루고 있다. <파 사 두>가 돋보이는 것은 펜슬 스케치의 자유분방한 그림 속에 이처럼 다양한 은유를 무리없이 담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물흐르듯 장면의 단절없이 자유롭게 변하는 그림은 모니크 르노가 초기작인 74년 <치어스>에서 보여주었던 표현 방법이다. <파 사 두>에서 절정의 기량을 발휘한 그녀는 앞서 언급했던 <오페라 이마지나리아>(1993)에서는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의 아리아 ‘여자의 마음은’의 선율에 맞춰 인상파 작가들의 그림을 새롭게 해석해 대가다운 면모를 과시했다.
김재범/ 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oldfield@chollia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