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下水戀歌>/ DMR 발매
그들이 3집을 발매했다. 우는 호도들, 다시 말하면 우는 호구들, 다시 말해 ‘크라잉 너트’이다. 이들은 델리 스파이스와 더불어 인디신의 팬들과 그 바깥의 팬들을 공유하고 있는 대표적인 밴드. 그런 밴드의 숫자는 한국 가요계 풍토 속에서 가장 전위적인 인디밴드의 숫자보다도 훨씬 적다. 따라서 어떤 면에선 더 각별하고 힘겨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친구들이라 할 수도 있다.
이번 앨범에서 그들은 “나의 지랄 같은 염병할 인생에 삼라만상의 꼬이고 또 꼬였던 돌아오지 않는 청춘의 여름날”(<양귀비>)을 노래한다. 웬 뽕짝 같은 신세타령인가. 펑크하는 아이들의 가사치고는 지나치게 감상적이지 않은가. 그들은 “꽃을 피워” 달란다. 웬 꽃.
하긴 크라잉 너트는 공전의 히트곡 <말달리자>에서부터 줄곧 ‘청춘’을 노래했다. 그 청춘은 자기도 모르게 달려야만 하는 청춘이다. 달려야만 한다는 건 우선 몸이 그렇게 길길이 뛰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 그래서 몸의 청춘, 슬픈 청춘이다. 또 하나, 달려야만 한다고 강요하는 세상의 요구 앞에서 무력한 청춘이다. “이러다가 늙는 거지 그땔 위해 일해야”(<말달리자>)한다는 걸 그들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세대적 송가가 되기 위해선 이들 특유의 코믹하고 긍정적인 비약이 필요했다. 그들은 그러면서도 뜬금없이 “우리는 달려야 돼 거짓에 싸워야 돼”라고, 의무형으로라도 말한다. 그 슬픔과 무력함과 인디적 의무감의 복합체가 바로 크라잉 너트이다.
이번 앨범을 들으면 그러한 크라잉 너트가 좀더 통속적으로 형식화되고 있다는 느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2집 때 스스로를 “서커스 매직 유랑단”이라 규정함으로써 그 통속적인 형식화가 본격화되더니 이번엔 약간의 복고와 촌스러움과 감상적인 싸구려 판타지가 섞인 특유의 통속화가 자기 식의 표현법을 굳히고 있는 듯하다.
그들은 러시아 민요풍의 마이너 코드와 2박자의 쿵짝거리는 리듬을 지닌 ‘한국형 뽕펑크’에서부터 70년대 대학가요제 노래들에서 들을 수 있는 촌스러운 한국형 모던 록까지, 여러 음악적 코드를 이용할 줄 아는 친구들이 되었다. 그 코드들은 웃기는 복합기호이다. 멜로디는 동요의 것이다. “옛날에 어떤 아이가 떡을 싸들고 왔는데 떡 속에 온통 돌덩이”(<웃기지도 않는 이야기>) 같은 노래가 잘 들려준다. 그 노래의 중간에는 “옛날의 금잔디 동산에 매기” 하는 가사도 나온다. 이들은 유치원 때부터 대학까지, 꽤 열심히 보통 아이들처럼 열심히 산 친구들이다. 학교에서 배운 것들말고 나머지 것은 대부분 텔레비전에서 배운 것들이다. “지나가던 과객이 물 좀 주소 여인네가 쪽박을 깨네…”(<지독한 노래>) 뭐 이런 가사들. 텔레비전에서 이들은 각종 2류스러운 스타일을 배웠고 기억 속에 들어 있는 그 스타일들을 재생한다.
그 모든 것들이 합하여 한국식 ‘펑크’가 출발한 자리에 뽕끼 서린 이들만의 뽕짝이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이다. 특히 감상적이려고 할 때 뽕짝은 엄청나게 질긴 생명력을 발휘해 이 모던한 시대의 청춘마저 거기에 발목이 잡힌다. <밤이 깊었네>에서는 그러한 뽕끼가 페이소스의 경지에까지 이르고 있다. 기억들을 동원해 기억을 배반하고 결국은 그 기억 속의 청춘처럼 지나가 버리는 일. 때로는 사물놀이를 접목시킬 만큼 음악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것들도 많지만 아직도 그들은 그러한 음악적 섭렵을 통해 방황하고 있다. 그 방황 속에서 이들의 ‘하수연가’(下水戀歌)는 여전히 자신들의 성장기를 그려내고 있는 중이다. 이들의 골수에 박힌 코미디가 알고 보면 진지한 이유는 거기에 있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