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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만화·애니 ... 앨리슨 드 비어
2001-07-05

소박한 일상의 소품

단편이나 순수 애니메이션에 심취해 어느 정도 ‘애니메이션 애호가’라고 자부할 만한 지식과 안목을 갖추게 될 때쯤이면 대개 묘한 도그마가 생긴다. ‘좋은 애니메이션이라면 그 안에 심오한 메시지나 세계관, 또는 시대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있어야 한다’는 이른바 ‘메시지 지상론’이다. 여기에는 애니메이션의 기법이나 그림체, 색채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까다로워지는 ‘과민성 탐미주의’도 동반한다. 전에는 즐겨 보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이 갑자기 천박한 상업주의로 보이고, 난해한 영상의 유럽 단편을 봐야 뭔가 ‘한 작품 보는 것’ 같은 쾌감을 느낀다.

앨리슨 드 비어(Alison de Vere)란 여성 작가가 있다. 27년 파키스탄에서 태어난 그녀는 51년 폴 그리몰의 <왕과 새>에서 처음 애니메이터로서 입문한 이후 유명한 ‘할라스-바첼로 스튜디오’에서 작가로서 경력을 쌓았다. 이후 TVC에서 <옐로우 서브마린> 프로젝트에 중요 작가로 참여했고, 그뒤 Trickfilm, WYATT-Cattaneo 등 여러 프로덕션을 거치면서 다양한 작품활동을 통해 영국의 대표적인 여류 작가로 명성을 떨쳤다. 올해 초 세상을 떠난 그녀는 지난 6월 안시페스티벌에서 특별 회고전이 열리기도 했다.

앨리슨 드 비어의 작품은 앞에서 언급한 ‘메시지 지상주의’의 시각으로 보면 그리 대단한 것이 못 된다. 세상을 향한 거창한 메시지나 인생의 싶은 통찰을 담은 것도 아니고, 재기 넘친 익살이나 예리한 풍자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녀의 애니메이션은 지극히 사적이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앨리슨 드 비어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남녀간의 사랑, 헌신, 미와 부에 대한 갈망, 허영,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 누구나 살면서 겪는 삶의 다양한 편린들을 마치 수필을 쓰듯 편하고 자연스럽게 펼친 작가이다. 그녀의 애니메이션은 다른 작품보다 편하고 자연스러운 느낌을 주는데, 이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입을 통해 말하기 때문이다.

75년작 <카페 바>(Cafe Bar)나 87년작 <블랙 독>(Black Dog)은 모두 그녀 자신이 주인공이 된 작품들이다. <카페 바>는 비가 오는 어느날 카페에서 만난 연인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머릿속을 스쳐가는 다양한 생각들을 영상화한 예쁜 소품이다. <블랙 독>은 꿈속에 나타난 검은 개에 이끌려 신비로운 세계에 들어간 그녀가 화려한 옷과 액세서리, 멋진 남자와 근사한 레스토랑에서의 데이트 등 속물적인 도락을 즐기다가 위기에 빠지기도 하고, 여기서 벗어난 이후에는 진실한 사랑을 얻어 아기를 낳는 등 우리가 흔히 꿈속에서 만나는 정말 ‘꿈같은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섬세하면서도 아기자기한 이야기에 걸맞게 그녀의 작품은 시각적으로도 화사한 색감과 간결한 선이 돋보인다. 샤갈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 회화적인 느낌의 인물들은 어찌 보면 프레데릭 벡의 초기 작품인 <일루션>이나 <타라타라>에 나오는 인물들과 무척 닮았다.

앨리슨 드 비어 애니메이션에서 발견하는 또다른 매력은 신화와 음악이다. 그녀의 작품에는 유난히 신화나 전설 속의 상징들이 자주 등장한다. <블랙 독>에 나오는 검은 개는 이집트 벽화에 나오는 죽음의 신을 형상화한 캐릭터이다. 이 작품에는 이외에도 허영과 쾌락의 상징으로 그리스신화 속의 동물인 하피를 의인화하는가 하면, 유럽 전설에 나오는 용을 등장시키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그리스신화에서 황소머리의 괴물로 등장하는 미노타우로스는 <블랙 독> 외에 <카페 바>에서도 등장한다. 94년작 <프쉬케와 에로스>에서는 아예 이야기의 모티브를 그리스신화에서 찾았다. 지극히 사적인 경험과 느낌을 표현하는 데 신화 속의 다양한 상징들을 자유롭게 활용하는 그녀의 상상력은 작품에 묘한 이국적 풍미와 신비로움을 더해주고 있다.

그녀의 작품에서 음악은 영상의 자유로움 못지않게 젊고 발랄하다. 우아한 현악이나 발라드보다는 포크록이나 재즈의 선율을 즐겨 사용한다. 79년 안시페스티벌 대상을 탄 <미스터 파스칼>은 종교적 성찰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와 달리 기타와 플루트로 이루어진 음악이 작품에 생기와 즐거움을 주고 있다. 히피들의 록 축제를 방불케 하는 후반부의 클라이맥스는 파스칼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서 내려와 부활한 예수와 함께 가슴 뿌듯한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또한 89년에 제작돼 그녀의 작품 중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TV단편 <천사와 군인 소년>에서는 아일랜드의 전설적인 켈트록밴드 클라나드가 음악을 맡기도 했다.

김재범/ 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oldfield@chollia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