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는 작가와 독자를 연결하는 소통의 통로다. 작가는 장르의 법칙을 통해 이미지를 배치하고 이야기를 풀어가며, 독자는 장르의 익숙함을 통해
이미지와 이야기를 받아들인다. 만화의 장르는 SF, 멜로, 판타지처럼 다른 매체와 공유하는 구분이 대부분이지만 만화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장르가 존재하기도 한다. 이영유의 <K2>는 만화, 그것도 여성들에게 소비되는 만화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장르다. 이영유의 <K2>는
통칭 ‘미소년물’이라 불리는 장르의 만화다. 혹자는 ‘꽃미남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성의 판타지, 동인지에서 시작되다
명칭이 의미하듯 이 장르의 핵은 ‘미소년 캐릭터’다. 미소년 캐릭터의 시각적 특징은 ‘친근함’에 있다. 요모타 이누히코가 <만화원론>에서
지적한 것처럼, 60년대에서 70년대 캐릭터들의 코는 어느 등장인물을 특권적인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한 역할을 했다. 그 결과 주인공의 코는
다른 주변인물과 달리 뾰족하고 높게 표현되었다. 일본이나 우리나라에서 ‘높은 코’는 부유, 신분, 권력 등의 상징으로 기능했다. ‘콧대가 높다’,
‘콧대를 꺾어주겠다’는 말이 일상적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되돌아봐도, ‘높은 코’는 평범한 인물들과 구분되는 전형적인 주인공의 표상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70년대 중반 일본만화에는 낮은 코의 주인공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80년대에 접어들어 전대의 주인공이 지닌 열혈의
풍모가 사라진 자리에 등장한 주인공들은 현저히 낮아진 코를 지니게 되었다.
에구치 히사시나 가쓰라 마사카스, 도리야마 아키라 등의 작품에 등장하는 낮은 코의 남자 주인공들은 정의를 위해 자신을 불태우는 ‘히어로’가
아니라 우유부단한 주인공이었다. 순정만화풍의 커다란 눈에 낮은 코를 지닌 여자 주인공들은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오스칼이나 마리
앙트와네트처럼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나 아름다움을 지닌 ‘헤로인’이 아니라 귀엽고 친근한 여동생들이었다.
커다란 눈, 낮은 코, 동그란 얼굴, 작은 턱, 삐친 머리의 캐릭터는 소년만화와 소녀만화가 서로 시각적 전형을 나누어 갖기시작한 80년대 이후 등장하기 시작했다. 소녀만화에 앞서 소년만화에 등장한 귀여운 남자 주인공들을 발견한 것은 소수의 여성 팬이었다. 이들은
소년만화의 남자 주인공들을 취사선택해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었다. 그 세계의 이름이 바로 ‘동인지’다. 귀여운 얼굴에 글래머 여성이 나만을
위해 봉사한다는 공상이 남성의 판타지라면, 미소년들이 서로에게 반해 얼굴을 붉히고 가슴이 두근거린다는 공상은 여성의 판타지다. 여성들은 동인지를
통해 소년만화에서 캐스팅한 주인공들로 판타지세계를 만들었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를 이끌어간 빅히트작 <드래곤볼> <슬램덩크>
<유유백서>의 주인공들은 상대방을 보며 얼굴을 붉히고,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상대방에게 화를 내며, 비를 맞고 집을 찾아가고,
울기도 하며, 안기기도 했다. 그렇게 여성들은 미소년들을 소비해갔다.
<K2>, 제도권 미소년만화의 전형
<K2>의 캐릭터들은 모두다 지금 바로 동인지에서 나온 듯한 화사한 분냄새가 난다. 티 하나없이 깨끗한 10대의 피부에 얇게 발라진
뽀시시한 파운데이션의 바로 그 느낌. 작가는 동인지의 기본 설정인 남-남 커플링의 설정을 대신해 얼굴이 똑같이 생긴 사촌 임정후(남)와 임태연(여)을
뒤바꾸었다. 남장여인의 설정은 일본 소녀만화의 시발점으로 평가받는 데즈카 오사무의 <리본의 기사>에서부터 시작된 전통적인 장르의
컨벤션. 하지만 <K2>에서 남장여인의 설정은 남장여인의 전통에서 시작된 것이라기보다는 동인지의 미소년 커플링을 대체한 개념이다.
멋진 CF 모델 강건을 만나기 위해 동생 임정후의 학교에 온 임태연. 그러나 등교하자마자 강파의 보스 김가은과 마주친다.치고받는 싸움을 강건이 말리며 임정후(진짜로는 임태연)는 김가은과 강건의 우정에 한 자리를 잡게 된다. 삼각관계의 기본 설정이 간단하게 완료된
뒤 무미건조한 강파의 보스 김가은은 임태연을 보고 얼굴을 붉히고 가슴이 두근거리게 만드는 소소한 사건이 연결된다. 표면적으로는 동인지의 남남
커플링이지만, 여장남자라는 안전판으로 인해 <K2>는 제도권 미소년만화의 전형을 정립한다. 1권이 김가은과 임태연의 해피엔딩으로
끝을 낸 뒤 이영유는 <K2> 2권에서 임정후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권규민과 최군함이라는 삼각관계를 설정한다. 겉으로는 얌전한 교내
동인지 회원이지만, 실은 엄청난 완력의 소유자인 권규민을 축으로 미소년 임정후와 최군함이 관계하는 양상으로 전개된다.
놀이동산 같은 만화
작가 이영유는 1998년 <이슈>의 공모전으로 데뷔한 작가다. 하지만 데뷔 전과 뒤가 별반 다를 것 없이 꾸준히 동인지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로도 유명하다. <Pastel Green Spell>이라는 판타지만화를 통해 남남 커플링의 동인지형 미소년만화를 선보인
작가는 <K2>를 통해 더 귀엽고 멋진 아이돌을 쏟아내고 있다. 처음 보면 낯설지만 자꾸 보면 친숙해지는 동인지형 미소년만화. 부끄러움을
뜻하는 얼굴의 세로줄과 “두근두근”으로 표시되는 심장의 떨림, 때때로 긴장을 풀어주는 3등신 캐릭터의 유머까지. 미소년들의 세계도 마냥 이상한
나라만은 아니다. 그들의 세계에서 튀어나와 주류 잡지로 위치를 옮긴 <K2>. 귀여운 캐릭터들의 신나는 판타스틱 월드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