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나는 본 영화 못지않게 제작사의 로고 영상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불이 꺼지며 스크린에 투사되는 영화사의 로고는 영화에 대한 기대를 한껏 돋우는 감칠나는 전채요리 같다. 사자가 포효하는 MGM이나 서치라이트가 거대한 숫자를 비추는 폭스사와 같은 전통적인 로고도 좋지만, 그보다는 최근 세워진 회사들이나 작은 회사들의 로고가 기발한 재치가 있어 더 좋다.
은하수에 낚시를 던지는 초생달 속의 아이가 나오는 드림웍스나 등대불이 반짝이는 캐슬록, 터벅터벅 걷는 나그네의 뒷모습을 담은 캐러번, 그리고 이름처럼 북구의 전설을 연상케 하는 발할라 등이 내가 좋아하는 로고이다.
그리고 하나 더 있다. 어느 집의 책상이든 하나쯤 있을 평범한 스탠드 등이 깡충깡충 뛰어와 회사의 이름 가운데 자리를 잡는 로고. 바로 디지털애니메이션으로 유명한 ‘픽사’(Pixar)사의 로고 영상이다. 3D 디지털애니메이션으로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회사의 전문 영역을 과시하면서, 2∼3초의 짧은 영상에 담은 잔잔한 유머가 인상적이다.
디지털애니메이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이라면 알겠지만 픽사사의 로고에 등장하는 책상 스탠드는 86년 발표돼 아카데미상 후보에도 올랐던 단편 <룩소 주니어>(Luxo Jr.)의 주인공이다. 이 단편의 감독은 존 레세터(John Lasseter). <토이 스토리>부터 시작해 <벅스 라이프>에 이르기까지 3D 디지털애니메이션의 전성기를 이룬 ‘픽사’의 간판스타이다.
존 레세터는 그동안 이력이나 작품세계에 대해 여러 매체들이 다루었고, <씨네21>에서도 여러 번 다룬 적이 있어 이제 독자들에게는 꽤 친숙한 감독이다. 그의 디지털애니메이션은 무엇보다 셀과 물감을 사용하지 않은 첨단 디지털기법을 사용하면서도, 아기자기하고 따스한 ‘아날로그’적 정서를 지향하는 데 매력이 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3D 디지털애니메이션 중 상당수는 영상작품을 보는 것인지 아니면 컴퓨터그래픽 테크닉을 과시하는 데모필름인지 구분이 안 되는 것이 많다.
3D나 2D의 디지털애니메이션에 부정적인 작가들이 지적하는 것도 이 점이다. 지난 번 안시페스티벌에서 만났던 마이클 두독 드 비트나 이고르 코발료프는 현재의 디지털애니메이션에 대해 “움직이는 자체에 쉽게 만족한다”, “너무 정형화되어 있다“며 그리 후한 점수를 주지 않았다. 심지어 이고르 코발료프는 3D 디지털애니메이션의 수작으로 불리는 <슈렉>에 대해서도 “내용이 없다”며 냉소적인 평가를 했었다. 하지만 이들도 픽사, 특히 존 레세터의 작품에 대해서는 모두 예외적으로 인정을 했다. 현란한 기술보다는 설득력 있는 이야기 구성에 먼저 신경을 쓰고, 얼마나 사실적인 영상인가보다는 얼마나 공감이 갈 만한 상황인가를 먼저 고려하는 존 레세터의 애니메이션은 시각적 볼거리에 머물지 않는다.그런데 존 레세터의 이러한 ‘아날로그’ 휴머니즘은 그 연원이 꽤 깊다. 아카데미 최우수 단편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한 얀 피카바 감독의 <제리의 게임>이 히로시마페스티벌에 출품됐던 98년이었다. 공원에서 장기를 두는 노인을 주인공을 한 <제리의 게임>은 캐릭터의 유니크한 표정 묘사와 익살맞으면서도 잔잔한 페이소스가 있는 내용이 디지털애니메이션의 수준을 한 단계 올렸다는 격찬을 받았다. 당시 히로시마페스티벌에는 70이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애니메이션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날카로운 안목으로 인기 높은 자유기고가 ‘오카다 할머니’(유감스럽게도 정확한 이름은 기억이 안 남)란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이 작품을 보고 이런 말을 했다. “역시 그 선생에 그 제자야. 얀 피카바는 존 레세터 밑에서 배웠고, 존 레세터는 데이비드 핸드에게서 배웠으니 저런 작품들이 나오지.”
데이비드 핸드는 과거 <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의 작업에도 참여했던 디즈니사의 전설적인 애니메이터로, 특히 1942년 그가 감독을 맡았던 <아기사슴 밤비>에서 따스하고 정감어린 연출로 호평을 받았다. 레세터는 70년대 말에 칼 아츠를 다니면서 디즈니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이 시절 말년의 데이비드 핸드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오카다 할머니의 설명이었다.
존 레세터는 현재 올 겨울 선보일 신작 <괴물 주식회사>의 제작에 한참이다. 그동안 픽사에서 보여준 귀여운 캐릭터와는 조금 거리가 먼 약간 엽기적인 괴물들이 등장한다는데, 하지만 등장인물이야 어떻든 레세터 특유의 여유있고 훈훈한 매력은 여전할 것으로 기대된다.김재범/ 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oldfield@chollia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