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블랑카> O.S.T/ EMI 발매
1942년, 그러니까 2차대전이 한참 진행중이던 때에 개봉된 할리우드의 고전 <카사블랑카>는 잊을 수 없는 음악을 담고 있다. 작곡자 막스 스타이너는 그야말로 할리우드 영화음악의 기본 정석을 만든 거장으로서, 영화 <킹콩>에서 천재적인 영화음악가로 주목받은 이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대작을 통해 최고의 영화음악가 반열에 오른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인 그는 드라마틱한 음악의 정밀한 구성을 통해 관객의 심리를 암시하고 유도하는 기능을 가진 전형적인 영화음악의 기초를 닦았다. 바그너의 음악적 전통을 물려받은 사람답게, 그는 ‘주제’ 선율의 상황에 따른 적절한 변주와 주인공들의 테마 선율이라 할 ‘라이트모티브’(leitmotive), 즉 유도동기의 도입을 본격화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후자를, 그리고 <카사블랑카>는 전자를 시도한 그의 가장 전형적인 스코어이다.
그러나 <카사블랑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노래는 스타이너의 것이 아니다. “키스는 키스일 뿐이고 한숨은 한숨일 뿐”이라는 유명한 가사가 들어 있는 <세월이 흘러도>(As Time Goes By)는 1931년 허먼 헵펠드가 만든 노래이다. 영화 속에서 루이 암스트롱의 흉내를 내는 흑인배우이자 가수인 둘리 윌슨이 샘으로 분장하고서 부른 이 노래는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측면을 돋보이게 만드는 키포인트이자 내러티브의 핵심이다. 이 노래는 지나간 날의 불같은 사랑이 불러일으키는 매력을 추억하도록 만든다. 또한 영화 속에 숨겨져 있던 로맨스가 표면화되도록 만드는 불씨이기도 하다. 이 노래를 타고서 릭(험프리 보가트)이 운영하는 ‘카페 아메리캥’에서 파리의 ‘오로르’ 카페로 시간이 거슬러올라가는 유명한 장면이 등장한다. 릭과 일자(잉그리드 버그만)가 사랑하던 옛 시절로 말이다. 서술상 과거를 밝혀주는 중요한 수법인 시간이동을 통해 관객은 이 영화의 가장 낭만적인 대목을 만난다.
이처럼 매력적인 주제 선율을 서술의 동인으로 삼음으로써 <카사블랑카>는 오랫동안 관객의 추억을 묶어두고 있다. 그것말고도, 이 영화에서 음악이 활용되는 방식은 여러 곳에서 주목을 끈다. 타이틀 롤과 더불어 맨 처음에 등장하는 스타이너의 테마도 매우 인상적이다. 아랍풍의 음계를 통해 카사블랑카의 이국적인 특성을 잘 살리는 테마가 흐르다가, 갑자기 프랑스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가 연이어 흐른다. 관객은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다. 어인 연결인가. 그러나 영화가 끝날 때면 맨 처음의 그 연결이 이 영화에서 쓰인 첫 복선이라는 걸 알게 된다.
또한 이 영화는 ‘서술의 현장’에서 흐르는 음악을 매우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 음악은 카페에 전속된 밴드가 연주하는 일종의 ‘현장음’들이지만 특별한 효과를 야기시킨다. 첫째는 일종의 대조법이다. 예를 들어 라즐로가 혁명투쟁에 대해 비밀결사 대원과 밀담을 나누는 동안에도 카페에서는 알 게 뭐냐는 듯 흥겨운 음악이 흐른다. 이러한 대조를 통해 관객은 더욱 긴장하게 된다. 또 유명한 가 연주되는 장면도 잊기 힘들다. “우울할 때면 탁탁 두드리며 노래해 봐요” 하는 이 노래가 연주될 때 배우들은 모두 관객이 되어 실제로 세번씩 테이블을 두드리며 노래를 듣는다. 그 장면에서는 ‘두겹의 관객’이 생긴다. 때는 전쟁중. 영화 속 카페에 모인 그 관객은 극장에 영화를 보러 온 관객의 감정이 이입되는 대상이다. 이러한 두겹의 관객을 통해 할리우드의 ‘관음증’이 내러티브상에서 정당화된다. 또 카페에 온 독일군 장교와 라즐로가 음악적으로 한판 붙는 장면. 라즐로는 독일군 장교의 노래에 저항하여 프랑스 국가를 부르도록 한다. 그 대목에서는 이 영화가 멜로물이면서도 2차대전을 현재형으로 담고 있는 영화라는 걸 생생하게 보여준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