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놀레티, 데이비드 데서 편·편장완, 정수완 옮김/ 시공사 펴냄/1만3천원
구로사와 아키라의 형은 변사였다. 변사는 무성영화시대에 영화가 상영되고 있을 동안 옆에 서서 “아, 우리의 주인공은 비통에 몸을 떨었던 것이었습니다”라는 투의 과장된 내레이션으로 한편으로 영화의 내용을 설명하고 다른 한편으로 영화의 감정선을 이끌고 가는, 영화의 본토인 서구엔 없었던 대단히 이례적인 존재였다. 허무주의자였던 구로사와의 형은 자살했지만, 변사라는 직업도 유성영화시대가 도래하면서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변사는 일본영화사 초기의 한 귀퉁이를 장식하는 ‘저개발의 기억’으로만 남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서구엔 없던 변사가 왜 일본엔 있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유성영화 초기까지 그들은 여전히 무대에 설 수 있었을까. 서구학자들이 일본영화의 비밀을 푸는 열쇠 중 하나가 변사라고 말하게 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일본인들에게 영화는 처음부터 일본의 전통 연희예술(주로 가부키)과 혼교하며 생성됐다. 가부키 공연에도 필름이 이용됐으며, 영화 상영에는 가부키 공연의 중요 인물인 변사가 참여했다. 할리우드는 ‘보이지 않는’ 형식을 추구해 1920년대 고전적 스타일을 확립했지만, 일본영화는 보이지 않는 형식이나 완전한 환영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이 점이 변사가 사라진 뒤에도, 일본영화가 전통 연극이나 다큐멘터리 기법을 부담없이 끌어들이는 등 형식의 혁신을 추구할 수 있는 하나의 동력이 됐다.
서구학자들에게 일본영화는 아직 많은 암호가 풀리지 않은 도전적인 연구 주제다. 미국에선 1992년에 출간된 <일본영화 다시 보기>가 일본영화 연구의 중간결산이라 할 만한 책이다. 도널드 리치가 <일본영화:예술과 산업> 초판을 낸 건 1959년이만 이 책의 성과를 근본적으로 뛰어넘은 저작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판단 아래 그간의 주요한 연구 성과를 분야별로 모은 것이다. 이 책에는 도널드 리치를 비롯한 쟁쟁한 일본영화 전문가들의 글 16편이 작가주의, 장르, 역사의 범주 아래 실려 있다. 일본영화의 미학적 특성에 대한 사전정보와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면, 3부인 역사 파트의 네 논문을 먼저 읽기를 권한다. 특히 변사에 관해 논하는 J.L. 앤더슨의 글과 데이비드 보드웰의 <전전 일본의 장식적 고전주의>는 개론적 성격이면서도 일본영화의 뿌리를 해명하고 있다.
2부 장르편에는 좀더 진전된 논의들이 이루어진다. 이 가운데 야쿠자영화에 관한 논문과 일본 희극영화 입문은 한국의 메이저 장르인 깡패영화와 코미디의 장르적 성격과 연관지어 읽으면 흥미롭다. 가장 까다롭게 느껴질 1부는 오즈 야스지로, 오시마 나기사, 미조구치 겐지, 고쇼 헤이노스케에 관한 글이다. 이 글들은 각각의 감독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없다면 읽어내기 어렵다. 이 파트는 번역도 거친 편이어서 일독을 권한다는 말이 잘 안 나온다. <열정의 제국>을 <열정의 황제>로 번역한 건(133쪽) 가벼운 실수로 넘어가더라도, “이 부분은 정치를 포함한 인간의 ‘비난받을 행위들’에 의한 추론과는 대조된다”(117쪽) 같은 대목은 다소 무성의해보인다.
그렇다 해도 <일본영화 다시 보기>는 일본영화의 미학적 특질 전반을 본격적으로 탐구하는 거의 최초의 번역서라는 점에서 반가운 책이다. 기회가 된다면 좀더 읽기 편한 글로 다듬어 출간해주기를 역자들에게 청하고 싶다.
허문영 기자 moon8@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