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모 가쓰히로의 <동몽>, 스기무라 신이치의 <호텔 캘리포니아>, 모치즈키 미네타로의 <상어 껍질 남자와 복숭아 엉덩이 여자>, 그리고 <좌부녀>. 국내 독자들에게는 낯선 제목의 이 작품들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1980년대 이후 영화적 감수성과 연출법에 큰 영향을 받은 새로운 경향의 만화가들에 의해 창작되었고, 단행본 1, 2권 분량으로 구성되어 실제 영화 한편의 길이와 비슷하고, 국내에는 제대로 번역 소개되지 않았고, 이들 작가들의 작품군 중 가장 높은 성취도를 이룬 만화들이라는 점이다.
<좌부녀>(세주문화 펴냄)는 모치즈키 미네타로가 청춘 개그에서 호러 계열로 접어들어가던 시점(1993)에 발표한 전환기적인 작품으로, ‘만화로 그릴 수 있는 서스펜스란 과연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걸작이다. 주인공인 대학생의 집에 어느 밤 수상한 여자가 찾아온다. 커다란 키, 긴 머리, 레인코트, 넓은 미간에 찢어진 눈…. 어느 모로 보나 기분 나쁜 인상의 이 여자는 옆집에 찾아온 손님이라며 전화기를 빌려달라고 한다. 새로운 여자친구와의 로맨스에 들떠 있는 주인공은 그저 옆집 남자의 여자친구라고 생각하며 신경쓰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밤 이후 괴녀의 집요한 스토킹이 시작된다.
전화기를 빌리며 알아낸 전화번호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화를 해대고, 전기계량기 위에 숨겨둔 열쇠를 찾아내 복사한 뒤 수시로 집안을 침범해 수상한 흔적을 남겨놓는다. 여자의 횡포를 참다 못한 완력파 친구가 힘으로 제압하려 하지만, 끝없이 얻어맞으면서도 지치지 않고 달려드는 여자에게 도리어 쫓기는 신세가 된다. 과연 그녀는 누구일까? 옆방 남자에게 버림받은 여자일까? 어린 시절 왕따당한 뒤 복수의 날만을 기다려온 초등학교 동창일까? 아니면 그냥 재수없이 나를 찍은 도시의 악령일까?
광각렌즈로 클로즈업되는 희멀건 눈, 편지지에 샤프로 깨알같이 적어간 글씨, 뜯겨나간 뒤 손에 감겨든 머리카락, 기이하게 옆으로 돌아가는 얼굴, 미친 듯이 돌진해오는 꾸부정한 덩치…. 현실에서 살짝 어긋난 괴담이 주는 공포는 판타지의 양념을 듬뿍 뿌린 귀신 놀음보다 몇배는 지독한 공포를 전해준다. 전래의 요괴 ‘우부메’, 현대의 괴담 ‘입 찢어진 여자’, 그리고 영화 <링>의 ‘사다코’ 등을 통해 재현되고 있는 일본 전통의 괴녀 이미지는 모치즈키 미네타로의 가늘고도 명료한 흑백의 선으로 더욱 절절하게 각인된다.
현대의 도시가 제공해주는 엄격한 치안, 젊은 남자가 가지고 있는 완력과 대범함, 이 어떤 것도 최종적인 안전 장치가 되지 못한다. 여성에게 잠재되어 있는 강간 공포만큼은 아니더라도, 모든 남자들의 내부에는 ‘어떤 여자’들에 대한 공포가 잠재되어 있다. 당신도 예외는 아니다.
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 manamana@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