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딩 포레스터> O.S.T | 소니뮤직 발매
한때 촉망받는 천재 취급을 받았으나 지금은 숨어서 지내는, 대중 앞에 나서기를 극도로 꺼리는 작가(윌리엄 포레스터: 숀 코너리)와 숱한 인종적 편견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사는, 그러나 천재적인 작가의 자질을 지니고 있는 열여섯살 흑인 소년(자말 월러스: 로브 브라운) 사이에 싹터가는, 있기 힘든 우정을 그리고 있는 이 영화는 ‘재즈’를 음악적인 중심축으로 선택하고 있다. 그 축은 둘로 나뉘는데, 하나는 마일스 데이비스와 오네트 콜먼이라는 두 거장의 음악이고 다른 하나는 독특한 자기만의 느낌을 지니고 있는 재즈 기타리스트 빌 프리셀이 쓴 오리지널 스코어이다. 이 영화는 마치 마일즈와 오네트와의 관계, 그리고 그들과 약간 비껴 서 있는, 그러나 여전히 비주류이자 고집불통인 빌 프리셀의 캐릭터가 등장인물의 캐릭터에 투영된 것 같아 보인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설명이 필요없는 재즈의 명인이자 달인이다. 40년대 말 재즈계의 주목을 받은 이래 50년대, 60년대, 그리고 70년대를 거치며 한순간도 ‘최고의 연주자’ 대열에서 이탈한 적이 없는 모던재즈의 태두 가운데 하나인 그가 들려주는 재즈는 한마디로 ‘쿨’로 요약된다. 하드밥 주자 같으면 열개의 음표를 불 대목에서 그는 단지 하나의 음표만을 ‘빰’하고 분다. 남들이 트럼펫이 터져라 높은 음을 불어젖히며 실력을 과시하지만 그는 중음 대역에서 소요하듯이 논다. 그러나 그 사운드의 폭발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 소리는 클래시컬한 교육을 제대로 받은 뮤지션들만이 낼 수 있는 꽉 차고 자신감 있는 소리이다. 절대로 객기부리지 않는 소리. 함부로 비브라토도 잘 안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절제된 소리에 이상하게 압도당한다. 듣는 사람들도 그를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체질적으로 프리와 잘 맞질 않는다. 프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함부로’ 하는 도발성 자체인 음악이기 때문이다. 마일스는 프리를 자꾸 따지려고 한다. 개방적인 정신을 지닌 사람이라면 프리를 거의 와락 껴안다시피하던 50년대 후반에, 그는 한발짝 물러서서 그 ‘정체’를 따지려 했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마일스 데이비스 같이 ‘제대로’ 배운 사람들이 진지하게 연구하고 노력한 끝에 도달한 지점이 프리라는 사실이다. 제대로 연구해서 넘어서는 행위 속에 들어 있는 무시무시한 진보성을 아무도 무시할 수 없다. 마일스는 프리 재즈로 가는 진정하고 든든한 징검다리였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프리의 대가인 오네트 콜먼 같은 이를 상당히 싫어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자서전에서도 오네트 콜먼을 약간은 ‘못 배워 먹은 놈’ 비슷하게 묘사하는 대목이 나온다. 맞다. 오네트 콜먼은 못 배운 뮤지션이다. 그는 처음부터 ‘프리’였다. 60년대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그는 아예 앨범 제목이 ‘프리 재즈’인 기념비적인 앨범을 냈다. 진보적인 걸음걸이가 아니라 아예 혁명적인 투신이다. 그런 사람들에 의해 혁명은 일어난다. 그에게는 제대로 배운 ‘음에 대한 상식’은 없어도 날개를 단 듯한 분방한 상상력과 아이디어가 있었다. 그는 사운드에 관한 자기만의 그림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더블 쿼텟’을 만든 것이다. 두개의 4중주단이 한꺼번에 연주하는 프리 재즈는 ‘소통’ 그 자체이다. 그런데 그 프리 재즈적 소통은 대중과 재즈 사이의 기존 소통체계를 무너뜨렸다.
스코어를 쓴 빌 프리셀은 이러한 흑인적 재즈 정사와 일정하게 무관한 사람이다. 그에게는 오히려 ‘하와이언 스틸’ 기타나 컨트리 세션 기타의 요소들에 대한 향수가 보인다. 꿈꾸는 듯이 흐르는 그의 기타는 도미솔 화음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흑인적인 음들보다는 그 순박한 기본 화음의 따스한 품에 안기려고 하는 느낌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묘한 손맛을 통해 미분음들을 넘나든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비주류인 것이다.성기완|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