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철 엮음|한나래 펴냄|1만원
“이상한 건 사람들이 실제 일상적인 삶에서는 비합리적이거나 모호한 요소들과의 만남을 아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영화나 소설 같은 예술작품에서는 그것과의 만남에 대해 불평한다는 사실이다…. 세계가 그처럼 복잡하다면, 그의 복합성을 작품에서도 재발견해야 한다.”(알랭 로브그리예)
논의의 대상을 영화로 한정한다면, 이 발언에 대해선 간단히 부인하고 싶은 유혹이 인다. 아주 즉자적인 건 이런 반발이다. 안 그래도 사는 게 안개 속이라 머리 아파 죽겠는데, 왜 영화를 보면서까지 그런 고통을 연장해야 한단 말인가(너희들끼리 복잡한 거 실컷 해라!). 1분쯤 생각하다가 이런 반문을 내놓을 수도 있겠다. 예술가라면 복잡한 실제 속에 감춰진 진리를 발견해 그것을 감동과 함께 전하는 사람 아닌가. 영화도 실제처럼 모호하고 복잡할 뿐이라면 그것의 존재 이유는 어디 있는가.
후자가 좀더 세련된 반문처럼 보이지만, 정말 답하기 어려운 건 전자다. 이 반문은 영화가 예술인가 엔터테인먼트인가라는, 무식해보이지만 아주 오래되고 까다로운 질문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프랑스감독 알랭 레네(1922∼)는 영화가 진리 탐구의 과정으로서의 예술이라는 명제가 존중됐던 문화권에서 성장해, 영화와 세계와의 새로운 관계를 발견한 위대한 예술가로 등재된다. 최근 서울 시네마테크가 회고전을 열면서 발간한 <알랭 레네>라는 책은 레네의 예술적 성취를 깔끔하게 요약하고 있는 편저서다. 후자의 반문을 진지하게 제기하는 사람에게라면 이 두텁지 않은 책이 현명한 답을 해줄 것이다.
알랭 레네 영화의 첫인상은 난해하다는 것이다. 단선적 이야기, 심리적으로 고정된 인물이라는 고전영화의 공식이 파기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현재와 과거, 의식과 실제, 때로는 주체와 타자의 경계가 무너져 있기 때문이다. 문학적 아방가르드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에 태어난 레네는 특히 초현실주의나 누보로망과 깊은 미학적 혈연관계를 맺었다. 누보로망의 대가 알랭 로브그리예와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그의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했다. 레네의 전위성은 그의 유별난 재능뿐만 아니라, 당대 프랑스의 예술적 자산의 결과물이기도 한 것이다. 책머리의 <알랭 레네의 작가적 형성기에 대하여>(홍성남)와 <레네와 누보로망>(박지회)은 레네의 이런 미학적 뿌리를 간결하고 명료하게 정리하고 있다.
뒤이은 <레네 영화에서의 시간과 기억>(김성욱), <잔혹한 회귀의 시간들:뮤리엘>(홍성남), <레네-그 편집증과 분열증>(김성태), <흡연/금연이 만들어내는 ‘운명선’>(이정우)은 레네 영화의 미학적 성취를 다각도로 분석하고 있는 글들이다. 여기서 레네가 단순히 범예술적 교양을 영화에 이식했다기보다는 그 스스로 영화라는 매체의 탁월한 이해를 바탕으로 완전히 새로운 시공간을 창안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알랭 레네-기억으로서의 세계>(임재철)는 가볍고 평이해진 것처럼 보이는 레네의 후기영화들이 실은 레네 평생의 주제였던 기억에 관한 심화된 탐구임을 밝히고 있다.
가장 눈을 끄는 건 말미에 실린 레네 및 로브그리예와의 인터뷰다. <카이에 뒤 시네마> 61년 9월호에 게재된 이 인터뷰에서 영화적 동지인 두 사람은 “사유와 그의 구조의 복합성에 다가서려는 아주 거칠고 원시적인 시도”로 자평한 자신들의 영화 만들기 방법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 글의 앞머리에 있는 두 반문 중에서 전자를 말하는 사람에게라면 그들의 태도는 어쩌면 낯설기 짝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시도들이 ‘위대한 영화의 시대’를 만들어냈다. 그것에, 적어도 한번은 눈길을 줄 만한 가치가 있다. 허문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