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들이 친구를 왕따시키는 동영상을 찍어 인터넷에 올렸고, 학교장은 책임추궁에 못 이겨 자살하고 말았다. 모두에게 깊은 상처가 되는 일이었겠지만, 인생의 10%를 갓 넘긴 사람과 70%를 넘게 산 사람에게 그 무게는 달랐을 것이다.
44살의 건설회사 작업반장 쿠로사와는 인생의 절반을 지나고 있다. 그러나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고, 내로라 할 만한 재산도 없다. 회사에서는 은근히 왕따를 당하고 있지만 그런 자신을 하소연할 친구는 망해가는 경비회사에서 들여온 신호 정리 마네킹 ‘타로’밖에 없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인망(人望)을 얻자.” 지구상에서 가장 외로운 중년 남자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전설의 첫 발자국을 뗀다.
생존을 위해 닥치는 대로 살아왔지만, 어느 날 돌아보니 자신에게 진정한 것은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중년 남자의 위기. 여러 소설, 영화, 만화에서 보아온 이야기다. 그 작품들 대다수는 우리에게 약간의 애절함을 던진 뒤에 이 사람이 삶의 희망을 찾아가는 과정을 편안히 좇아가게 해준다. <어바웃 어 보이>나 <쉘 위 댄스>처럼 냉정하게 까발리는 듯 살살 어루만져준다. 그러나 자칫 느슨한 마음으로 이 작품 <최강전설 쿠로사와>(학산문화사 펴냄)를 펴드는 사람은, 주일학교 공부하러 가는 마음으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러가는 여고생과 같다고 생각한다.
<도박묵시록 카이지> <은과 금>의 후쿠모토 노부유키는 그런 관대함을 보여줄 만화가가 아니다. 도박, 사채, 주먹 등 무엇을 다루더라도 인생의 밑바닥을 보여줘야만 성이 차는 작자다. 살짝 보여주지도 않는다. 이 정도면 올라가겠지 싶은데도 두세 구덩이 더 밑으로 파내려가는 사디스트다. 존재 자체가 주식시장의 ‘검은 금요일’ 같은 인간이다. 그가 중년의 왕따 남자를 다룬다면 당연히 다음 장을 넘기기 싫을 정도로 구질구질하고 비참한 인생을 보여주리라는 사실을 예상해야 한다.‘전설’이 깃든 만화는 언제나 ‘고아’, ‘외팔이’, ‘반신불수’ 등 가장 비참한 처지에 있는 주인공에게 희망의 틈을 보여줌으로써 시작한다. 그 틈은 흔히 남들보다 뛰어난 재능이다. 그러나 쿠로사와에겐 그런 자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의 결심은 스스로 인생의 바닥을 쳤다는 절박감 속에서 시작되었다. 공사 현장에서 직원들의 인망을 얻기 위해 찬 맥주를 준비하고, 전어튀김 도시락을 마련하는 우둔한 시도는 더 큰 수렁을 만들고 만다. 언젠가 제목처럼 전설을 만들어낼지 모르지만, 그 지난한 과정을 충분히 견뎌낼 수 있는 독자들만이 승리의 기쁨을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 manamana@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