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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를 넘어선 부조리
2001-05-31

이토 준지, 다이지로 모로호시의 공포만화

만화는 부조리한 것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부조리의 성이다. 평범한 시각에서 보자면 그렇다. 한두개의 선과 원만으로 거뜬히 사람이 되어버린다.

현실에서 만나는 복잡한 얼굴들이 그저 단순한 면과 선으로 대치되어버리는 부조리가 만화의 출발이다. 칸과 칸을 통해서 전개되는 형식도 부조리하기만

하다. 정지돼 있는 그림들이 제각각 살아서 움직이고 앞의 칸과 뒤의 칸이 관계를 맺는 방식도 역시 부조리하다. 말풍선은 어떤가? 캐릭터의 입가에

달린 꼬리에 붙은 풍선에 적힌 글만으로 그 캐릭터의 소리까지 들린다. 말풍선에 있는 커다란 글자는 소리의 크기를 이야기하고, 말풍선의 모양은

캐릭터의 기분을 상징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부조리가 만화의 존재방식이며 시각 이미지가 존재하는

방식이다. 형상의 대표성을 추출하는 추상(抽象)의 원칙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만화의 부조리를 받아들인다. 물론 거기에는 삶에서 거듭되는 자연스러운

훈련이 존재한다.

어처구니없음이 주는 카타르시스

만화에서 부조리는 형식은 물론 내용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근대만화 출현 이후 만화에서 반복 사용되는 특유의 과장은 전형적인 만화의

부조리다. 머리에 커다란 혹이 달리고, 발이 보이지 않게 달리고, 손이 길어지고, 목이 빠지며, 잠잘 때 코에 방울이 매달리는 과장은 만화

보기를 즐겁게 한다. 만화는 그렇게 부조리로 우리와 커뮤니케이션한다.

하지만 최근에 발견하는 만화의 부조리는 더 파격적이다. 형식적 부조리, 표현의 부조리를 넘어서는 부조리만화가 등장한 것이다. 우리 말로 표현하면

어처구니없는 만화들이다. 이토 준지나 다이지로 모로호시의 공포만화는 ‘공포’라기보다는 ‘부조리’에 가깝다. 한마디로 어처구니없다.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라면 “이게 뭐야?”라는 반문이 나올 정도로 황당하다. 적어도 공포만화에서 있을 법한 클리셰나 컨벤션은 찾아보기 힘들다. 소용돌이의

힘에 지배당해 온통 소용돌이 모양을 하고 있거나, 다른 세계에서 온 듯한 거대한 얼굴 모양의 아내와 자연스럽게 살고 있고, 공원의 쓰레기봉투에서

발견한 토막살해당한 목을 어항에 키우는 말도 안 되는 부조리가 자연스럽게 존재한다.

이토 준지나 다이지로 모로호시의 만화는 마치 얼마나 황당한 부조리를 서로 개발하는지를 내기하고 있는 듯한 만화로 보인다. 도끼를 든 살인마가

방탕한 청소년을 죽이거나, 검은 양복을 입은 송곳니의 뱀파이어가 나오는 공포만화를 기대한 독자라면 이 두 작가의 공포만화에서 ‘공포’를 경험하기

힘들 것이다. 현실에 근거한 불가사의한 일에서 스릴을 느끼는 미스터리 팬들이라면, 현실과 미스터리의 교차점에서 느껴지는 그 짜릿함을 이 만화에서

단 한번도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이토 준지와 다이지로 모로호시의 공포만화에서 에피소드가 시작되는 지점은 현실에서 이탈하는 지점이다. 마치 4차원의 세계로

들어가듯 주인공들은 공포의 세계로 들어간다. 주인공들에게는 그 세계가 공포일 수도 있지만 독자들에게는 아니다. 만화는 칸과 칸으로 분리돼 있기

때문에 영화에서처럼 어둠 속에서 스크린과 조우하는 공포나 놀래킴이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주인공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어처구니없게 바라본다. 그 어처구니없음에 만화 읽기를 포기하면 그걸로 끝이다. 하지만 어처구니없음이 주는 재미, 부조리한 이야기들이 만화 내부에서

일정한 법칙을 얻고 움직이는 재미를 느끼기 시작하면 이 만화들은 나에게 묘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공포와 스릴을 즐겨라!

이토 준지의 만화가 주인공들이 어처구니없는 일로 고통을 겪는 패턴이라면, 다이지로 모로호시 만화의 주인공들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황당한 사건과

고통이 현실에서 분리되면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즐긴다. 똑같은 상황이라도 이토 준지 만화의 주인공들에게는 공포고, 다이지로 모로호시

만화의 주인공들에게는 스릴인 것이다. 이토 준지의 만화가 현실타입이라면, 다이지로 모로호시 만화는 놀이공원타입이다.

같은 반 여학생인 시오리와 시미코는 황당한 사건에 곧잘 연루되지만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그 상황을 즐긴다. 호기심이 왕성한 시오리는 도통 겁이

없고 새로운 사건에 휘말리는 것을 좋아한다. 고서점을 하는 시미코는 늘 이상한 책을 가지고 와 사건에 발단을 제공한다. 이런 식이다. 토막살해당한

머리를 발견한 시오리가 시미코를 부르고, 다음날 ‘살아 있는 목의 사육법’이라는 책을 가지고 와 시오리에게 수조에서 잘린 머리를 키우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잘린 목은 물고기처럼 수조 안에 적응해, 실지렁이를 받아먹고 눈동자를 움직이기도 한다. 두 소녀는 이 목에게 류노스케라는 이름을

지어주기도 하지만 도저히 키우기가 곤란해지자 강에 방생한다. 강으로 들어간 류노스케가 잉어에게 쪼이자 두 소녀는 걱정하다가, “앗! 잉어를

물었다… 좋았어! 씩씩하게 살아라!”라며 응원도 보낸다. 이렇게 두 소녀는 자신들에게 일어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즐기며 살아간다. 쫓겨다니고

괴로워하는 이토 준지 만화의 주인공들에 비해 더욱 부조리한 주인공들이다.

만화도 부조리, 현실도 부조리

다이지로 모로호시의 만화는 <시오리와 시미코의 살아 있는 목>, <시오리와 시미코의 파란 말>이라는

제목으로 두권이 출판되었다. 무섭지 않은 공포만화라서 밤에 봐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너무나 어처구니없어 꿈에도 나오지 않는다. 어차피 꿈도

현실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이 만화를 읽을수록 우리의 삶과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라비린스’라는 단편은 한 망해가는 놀이공원의

미로에 대한 이야기. 이 미로에 들어간 시오리와 시미코는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여전히 미로 속이다. 시오리는 한달 동안 화장실을 가기 위해서

벽장과 정원과 아빠의 서재를 지나야만 하고, 방으로 가기 위해 베란다의 왼쪽 두 번째 유리문을 지나, 1층 복도와 침실 옷장을 통과해야 한다.

하지만 이 미로는 놀이공원에서 단서로 받은 양배추와 고기 사이라는 키워드를 풀면서 해결된다. 냉장고로 들어간 시오리가 거대한 도서관에 있는

시미코를 만나고, 이들이 미로로 돌아가며 출구를 찾게 된다는 이야기다. 불가사의한 세계에서 미로를 헤맨 시오리와 시미코의 모습이 2001년

우리나라에서 살고 있는 내 모습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게다가 시오리와 시미코 주위에 가득 찬 괴물들이 우리 주위에도 가득하다. 어차피 우리도

시오리와 시미코만큼이나 상식이 통하지 않는 부조리한 세상에서 살고 있으니까. 박인하| 만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