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천년의 첫해에 해당하는 2000년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97년 이후 깊은 침체의 늪에 허덕여온 만화계는 새 천년을 맞아 불황 탈출을 기대했지만 올해 역시 기쁜 소식보다는 우울한 소식이 더 많았다. 다사다난했던 올 한해 만화시장을 결산해본다.
1. 단행본 만화시장, 극심한 불황
올해 만화시장은 단행본 만화의 판매 부진으로 극심한 불황에 시달렸다. 초판 발행부수가 1만부를 넘어선 만화의 종수가 눈에 띄게 줄어든 대신, 손익분기점에 해당하는 초판 6천부를 발행하지 못한 만화가 크게 늘어났다. 심지어 초판 3천부만 찍은 만화도 있다. 단행본 만화시장이 이처럼 ‘고사위기’로 몰리고 있는 단행본 만화의 주된 유통 경로인 대여점 수가 한창 때의 절반에 불과한 1만1천∼1만2천여개로 감소했기 때문. 여기에 눈에 띄는 신작이나 신인만화가의 부재 또한 단행본 만화시장 침체를 부채질하고 있다.
2. 만화잡지 줄줄이 폐간
지난해에는 만화잡지의 창간이 줄을 이었다면 올해에는 만화잡지의 폐간이 줄을 이었다. 올해 가장 먼저 폐간된 잡지는 ‘성인만화잡지의 마지막 보루’로 남아 있던 <빅점프>. 1천원짜리 만화잡지 <히트>나 <쎈> <코믹팬티>는 발행주간을 주간에서 격주간으로 바꾸는 몸부림까지 쳐봤지만 결국 폐간의 운명을 맞았다. 특히 삼양출판사는 <코믹엔진>과 <코믹펀치> 두 잡지를 동시에 접는 아픔을 맛봤다.
한편 올해 창간된 만화잡지로는 대원씨아이의 <해피>와 학산문화사의 <쥬티> 두종의 순정만화잡지와 영지인 시공사의 <기가스>가 있다.
3. 인터넷 만화시장 활황
출판 만화시장의 불황과는 대비되는 것이 인터넷 만화시장의 활발한 움직임이다. ‘코믹스투데이’ ‘D3C.com’ ‘이코믹스’ ‘코믹플러스’ ‘n4’ 등 ‘만화 포털 사이트’들이 잇따라 선을 보였고, ‘클럽와우’ ‘포스트넛’ ‘애니비에스’ ‘엑스뉴스’ 등 플래시 애니메이션 전문 사이트들도 많이 생겼다. 그러나 대부분의 만화 사이트들이 아직 수익모델을 찾지 못해 고전하고 있는 현실. 현재 무료로 서비스중인 업체도 유료화 전환을 계획하고 있어 내년에는 인터넷 만화시장에도 거센 구조조정 바람이 불 것으로 여져진다.
4. 순정만화가 결혼의 해
올해는 ‘순정만화가 결혼의 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순정만화가들의 결혼소식이 잇따랐다. 올해 결혼한 순정만화가는 어숙일, 최경아, 김은희, 원수연, 이빈, 석동연씨. 이중 원수연, 이빈, 석동연씨는 ‘연상연하 만화가커플’로 탄생해 특히 화제를 모았다. 남편은 각각 만화가 강성수, 전호진, 정필용씨. 특히 원수연씨는 8살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결혼에 성공해 ‘사랑에는 나이가 없다’는 말을 증명했다.
최경아씨는 스토리작가인 엄재경씨를 남편으로 맞아들여 지상월-소주완 커플에 이어 두 번째 ‘만화가-스토리작가 커플’을 기록했다.
5. 대형서점 만화매장 재등장
97년 7월 청소년보호법이 발효되면서 만화는 서점에서 자취를 감췄다. 이른바 ‘만화사냥’이 벌어지면서 서점주들이 골치아픈 만화를 아예 팔기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해 들어서는 대형서점들이 앞다퉈 만화매장을 열고 있다. 먼저 지난 6월 영풍문고가 대형 만화매장을 신설했고, 이어 삼성동의 서울문고가 만화매장을 마련했다. 이에 자극받은 교보문고 또한 지난 11월 97년 이후 3년 만에 다시 만화 매장을 열었다. 여기에 시공사가 인수한 을지서적도 만화매장을 준비중인 것으로 알려져 이제는 대형서점에서 쉽게 만화를 살 수 있게 됐다.
6. 만화 및 애니메이션 관련서 출간 홍수
만화시장의 침체와는 대조적으로 올해는 괜찮은 만화 및 애니메이션 관련서가 쏟아져 나왔다.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만화이론서로 인정받고 있는 <그림을 잘 엮으면 만화가 된다>, 만화이론의 학문적 토대를 닦은 <만화원론>, 우리나라 순정만화 50년을 정리한 <누가 캔디를 모함했나>, 카툰의 역사를 기록한 <카툰-풍자로 압축시킨 작은 우주> 등이 올해 출간된 대표적인 만화이론서. 일본만화 및 애니메이션 관련서로는 <망가 VS 만화>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렇게 창작한다!> <애니메이션은 나에게 꿈꿀 자유를 주었다> <오타쿠> 등이 나왔다.
7. <천국의 신화> 음란 판결
“<천국의 신화>는 음란물이다.” 서울지법 김종필 판사는 지난 7월 11일 열린 이현세씨의 청소년 만화 <천국의 신화>에 대한 1심 판결에서 결국 검찰의 손을 들어줬다. 즉 이씨에게 미성년자보호법 위반죄를 적용, 벌금 300만원을 선고한 것. 만화계는 이에 대해 “만화 창작의 자유를 침해하는 시대착오적인 판결”이라며 반발하며 22개 문화예술단체들과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집단 행동에 나섰지만 아직 만족할만한 가시적인 성과는 거두지 못한 상태다. 한편 이씨는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를 신청해 현재 2심 재판이 진행중이다.
8. 홍콩 만화 인기몰이
화려한 연출, 탄탄한 구성, 깔끔한 전개 등 정통 무협만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홍콩 만화가 어려운 만화시장 속에서도 꾸준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홍콩 만화 붐의 쌍두마차는 마영성의 <풍운>과 하지문의 <절대쌍교>. <풍운>은 지난해 6월 제1권을 선보인 이래 현재 단행본으로 50권 이상 발매됐다. 권당 1만부 이상 팔렸으니 도합 50만부 이상 팔린 셈이다. <절대쌍교> 또한 30권 이상 발간되며 홍콩 만화의 인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이 밖에 풍지명의 <패도>, 온일량의 <무신>, 류복성의 <심진기>, 황옥랑의 <신병현기> 등도 무협만화 팬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9. 예술성 빼어난 프랑스 만화 소개
홍콩 만화 외에 탄탄한 회화적 기초와 문학작품 못지않은 스토리 구조로 ‘제9의 예술’이라 불리는 프랑스 만화 또한 활발하게 소개되고 있다. 뫼비우스의 <잉칼:존 디풀의 모험>(글 조도로프스키), 레지스 르와젤의 <피터팬>, 이슬레르의 <쌍브르>(글 발락), 엥키 빌랄의 <니코폴>, 미겔란소 프라도의 <섬>, 파스칼 라바테의 <이비쿠스> 등이 최근 출간된 대표적인 프랑스 만화. 프랑수아 부크의 <제롬 무슈로의 모험>, 샤를 베르베리앙의 <앙리에트의 못말리는 일기장>(글 필립 뒤퓌), 루이 트롱댕의 <종이괴물> 시리즈 등 어린이들이 보기에 좋은 프랑스 만화다.
10. 단행본 만화 판형 다변화
만화 단행본의 판형 변경 또한 올해 눈에 띄는 변화 중 하나다. 일본만화 번역판을 중심으로 지금까지의 사육판(4·6판:128×188mm)에서 일본의 만화단행본 크기 그대로인 신서판(113×176mm)으로 조심스럽게 판형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 만화출판사들이 판형을 바꾸는 ‘모험’에 나선 것은 독자들의 구매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다. 즉 좀더 콤팩트한 사이즈의 만화를 내놓음으로써 신선한 느낌을 주는 동시에, 갖고 다니기 쉽게 만들어 독자들이 좀더 만화를 가까이하게 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
김이랑/ 만화평론가dreamy21@lyco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