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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껏 경배하고, 마음껏 조롱하라
2001-05-24

쾌락의 급소 찾기 31 - 가장 기가 막힌 패러디 장면은?

패러디란 버섯과도 같은 존재다. 하나의 작품이나 하나의 장르가 울창하게 성장해야만 그 그늘 아래 피어난다. 어쩌면 패러디란 자신에게 태양

한줌 전해주지 않고 혼자서 하늘을 뒤덮고 있는 그 대작, 그 인기작의 위용에 대한 반역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패러디란 그 거대한 나무가

없었다면 애초에 태어나지도 못했을 존재. 어쩌면 그 나무가 너무나 좋아 가까이하고 싶지만, 그럴수록 나무에 기생할 수밖에 없는 가엾은 신세인지도

모른다. 패러디는 그 지독한 애증의 천칭 위에 서 있다.

오스칼처럼, 에드가처럼

황금의 시대가 있었다. 70년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시대가 저물어갈 때 패러디의 버섯이 서서히 대지를 뒤덮기 시작했다. 70년대 절정의

장르라면 남자만화쪽으로는 스포츠 근성물, 여자만화쪽으로는 미소년 동성애물이다. 이 시대 인기작들은 현재도 가장 높은 지명도를 누리고 있고,

그래서 가장 빈번하게 패러디의 소재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미 70년대 후반부터 이들의 열혈과 순수와 절대미는 조롱받고 있었다. <파타리로>는

그 시대에 태어나 아직까지 살아 있는 패러디의 대마왕이다.

<파타리로>는 골격만 따져보면 소년 주인공이 등장하는 미스터리 액션물이다. 아버지가 남겨준 왕국을 지키고 세계의 평화를 구해야

하는 소년 왕이 세계와 우주를 넘나들며 모험을 벌인다. 그러나 그 골격을 뒤덮고 있는 살은 소녀만화, 특히 미소년 동성애물을 철저하게 조롱하는

패러디의 유기물이다. 파타리로는 3등신인 주제에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오스칼을 흉내내며, <포의 일족>의 에드가처럼

장미 꽃잎을 차에 타서 먹는다. 극단적으로 아름다운 소년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온갖 종류의 비정상적인 연애와 섹스관계를 묘사한 미소년물의

견고한 성(城)이 없었다면 <파타리로>는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원작들을 접하지 못했다면 <파타리로>의 개그는

절반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파타리로>가 국내에 9권으로 절판된 것은 내용의 수상쩍음도 있지만, 그것을 이해할 만한 문화가

충분히 조성되지 못한 탓도 클 것이다.

70년대, 다양한 패러디의 행진

패러디는 기생체다. 숙주는 거대할수록 좋다. 아무도 모르는 작품에 대한 패러디는 애당초 아무런 의미가 없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70년대 인기작들은 너무나도 좋은 환경을 제공한다. 그것들은 지나치게 유명했고, 무모하게 열렬했고, 견고하게 패턴화됐고, 그 패턴을

모방한 아류작들을 줄기줄기 재생산해왔다. 열혈이란 그런 것이다. 함께 뜨겁게 달려갈 땐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한번 그 열기에서

떨어지면 ‘도대체 저것이 무슨 짓이람’ 할 정도로 우스꽝스러워 보인다(마사루의 광기에 도취했다가도, 빨리 ‘일반 학생’이 되고 싶어하는

후멍의 고독도 그런 종류의 것).

<유리 가면>의 죽음을 각오한 수련과 변신에 가까운 연기는 <골때리는 연극부>의 극단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주인공은

여배우 어머니의 혹독한 수련으로 연기수업을 받아 어떤 캐릭터로든 변신할 수 있다. 심지어 개 같은 동물, 빗자루 같은 사물까지 완벽하게

연기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부작용으로 온몸이 3등신의 땅꼬마로 변해버렸고, 머릿속엔 온갖 변태적인 생각밖에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연기의 용도도 볼썽사납다.

<꼬마 데카> <호모호모 세븐>과 같은 70년대 개그만화들은 단지 한두 작품의 패러디에 그치지 않고, 강력한 주인공들을

내세워 여러 작품을 복합적으로 모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골때리는 탁구부>도 그 계승자이지만 역시 엑기스는 <이나중 탁구부>의

이자와 마에노 콤비와 <해피 마니아>의 시게타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적시적소에서 유명한 만화 주인공이나 실제 인물, 혹은

다양한 동물들로 변신해서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내일의 조>는 참으로 여러 작품에서 패러디되는데, <이나중 탁구부>에서

조의 뾰족머리를 흉내낸 이자와의 머리를 자른 뒤 죽순을 올려놓은 것이 그중 압권이다.

단순한 유머에서 팝 아트까지

패러디는 단순히 개그물에서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장르의 만화에서도 약간의 유머를 주기 위해, 혹은 그 작품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유명한 장면들을 인용하기도 한다. 아다치 미쓰루의 최근작인 <미소라>의 첫 에피소드에 돼지떼가 학교로 돌진해오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내일의 조>에서 조가 돼지떼를 몰아 소년원을 탈출하려다가 리키이시의 공격을 받고 맥없이 쓰러지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아다치는 워낙 비슷한 작품들을 많이 양산해서인지, 자기 작품의 패러디도 빈번하게 발견된다. 야자와 아이 같은 경우에는 <천사가

아니야>의 주인공이 <내 남자친구 이야기>에, <내 남자친구 이야기>의 주인공이 <파라다이스 키스>에

나오는 등의 장치를 만들어두는데, 한 작품의 주인공을 다른 작품에 카메오 출연시키는 것도 포괄적인 자기 패러디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모두 다 만화광들을 위한, 특히 그 작가의 팬들을 위한 장치다.

조롱의 특기를 지닌 패러디가 단순히 유머만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때론 특정 작품의 의미를 극단화하면서 새로운 예술적 효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국내에 소개되지는 않았지만 후루야 우사마루의 <파레포리>는 극도로 정교한 화법으로 기성의 만화 캐릭터를 재현하면서 극단적인

아이러니를 만들어낸다. 때론 <내일의 조>가 <멋지다 마사루>를 읽고 애교 코만도를 따라하다가 얻어터지는 코믹한 장면도

나오지만, <도라에몽>의 얼굴을 난잡한 성교 장면으로 재구성하는 등의 가히 ‘팝 아트’라고 할 만한 묘사도 등장한다. 최근 <울어라

휘파람새>가 일본의 연예인, TV스타, 정치인, 유명 만화 등을 복합적으로 패러디하면서 극히 일부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국내 독자로선

그 패러디의 대상을 거의 알 수 없기 때문), 그의 복잡한 패러디 조합물 속에 <파레포리>의 한 장면도 재현된다.

이명석|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중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