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이어 <애니메이션 저널>의 편집인 모린 퍼니스가 선정한 단편 애니메이션의 기대주를 살펴본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3D로 대표되는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선명한 색감에 티 하나없이 깔끔한 영상이 왠지 정이 잘 가지 않았다. 특히 컴퓨터의 탁월한 성능을 자랑하듯 ‘기계 냄새’만 잔뜩 풍기는 작품에 대해서는 “저것도 애니메이션이냐”라는 경멸감마저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등장한 디지털 테크닉의 단편들은 나의 이런 ‘옹졸한 편견’을 비웃듯 기발한 아이디어와 작가정신으로 꽉 찬 작품들이 많다.
3분짜리 3D 디지털 애니메이션 <헬로 돌리>(Hello, Dolly!)도 그런 작품 중 하나이다. 미국의 학생감독 마리코 호시가 만든 이 단편의 주인공은 양이다. 양은 서구의 동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동물 중 하나이다. 특히 잠이 안 올 때 주인공의 머리 위에 말풍선이 등장하고, 그 속에서 울타리를 넘는 양의 숫자를 세는 것은 미국 애니메이션 TV시리즈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장면이다. <헬로 돌리>는 그런 애니메이션의 관습적인 표현에서 착안한 단편이다.
이 작품에서 양들은 정말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처음에는 울타리를 뛰어넘는 전통적인 모습으로 등장하다가 그 다음에는 엽기적인 과학 실험의 희생 ‘양’(?)이 된다. 마지막에는 자신들을 괴롭힌 인간에 대한 통쾌한 복수.
<헬로 돌리>가 평가받는 것은 기존에 볼 수 없던 참신한 표현방법. 사람의 실루엣을 이용해 양의 모양을 형상화하는가 하면, 3차원 캐릭터가 침대 위에서 펄쩍펄쩍 뛰고 뒹구는 모습을 절묘하게 그리고 있다. 그녀는 또한 실사영화에서 쓰던 기법도 능숙하게 구사한다. 다양한 카메라 앵글과 프레임 사이즈의 변화를 통해 인물의 심리상태를 표현하는 등 대사 한 마디 없는 짧은 단편에서 시각적 표현만으로 훌륭하게 스토리를 엮어가고 있다.
미국 작가 마이크 블룸의 <기름과 식초>(Oil & Vinegar) 역시 3D 디지털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3분짜리 작품이다. <기름과 식초>는 주방용품인 기름과 식초의 사랑을 그린 ‘슬픈’ 동화. 마이크 블룸 감독은 할리우드영화의 전형적인 로맨스 장면을 부엌에 있는 일상용품을 이용해 패러디했다. 작품에 담긴 귀여운 유머도 재미있지만, 그보다 더 관심을 끄는 것은 이 작품이 월트 디즈니의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졌다는 것. 하지만 디즈니 브랜드를 정식으로 붙이고 나온 작품도 아니다.블룸은 현재 디즈니 스튜디오에서 개발소프트웨어의 시니어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데, <기름과 식초>는 문자 그대로 ‘일과 이후’의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만든 작품이다. 그는 자신의 밑에 있는 젊은 스탭 중 디지털 장편 애니메이션 경험이 없는 자원자를 모아 9개월에 걸쳐 이 작품을 제작했다. 개발중인 소프트웨어의 성능도 실험하면서 후배들에게 창작 작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 일종의 훈련용 애니메이션이다. 애니메이션 산업에서 거대한 공룡으로 군림하고 있는 디즈니의 저력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소개하다보니 묘하게도 젊은 학생들의 작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다음에 소개하는 <아틀라스 음료수를 마시다>도 로드 아일랜드 디자인학교의 학생 마이클 오버벡의 작품이다. 갓 스무살을 넘은 이 젊은 감독은 3분30초짜리 작품으로 많은 페스티벌에서 호평을 받았고, ‘ASIFA-EAST’의 학생 부문에서 1등을 했다.
‘아틀라스 음료수를 마시다’는 엽기적으로 얽혀 있는 혼돈의 세계를 우화의 틀을 빌려 그리고 있다. 물고기가 바다를 나와 땅 위를 걸으면서 이야기가 시작돼 상어나 범고래가 초인종을 울리고 사람들을 잡아먹는다. 흔히 평화롭고 목가적인 이미지의 상징인 암소가 천연덕스럽게 지나가던 개나 토끼를 잡아먹는 장면에서는 작가의 상상력이 극에 달한다. 여기에 추상화된 영어로 된 대사는 오버벡이 창조한 혼돈의 세계에 묘한 부조화를 더해준다. 왜곡되고 혼탁한 우리의 현실과 환경에 대한 젊은 작가의 싸늘한 조소가 신선하게 느껴지는 가작이다.김재범|동아닷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