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Culture > 초이스 > 도서
통일한국의 예언서?
2001-05-17

장르 컨벤션에 충실한 하드보일드 액션 <건비트>

2001년, SF의 연대인 2000년대로 접어든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종말의 예언과 짝을 이룬 1999년을 마감하고 2000년대로

접어들었지만 SF의 상상력은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뉴스를 통해 만나는 화상전화나 DNA 복제 등과 같은 과학의 결실은 사실 오래 전에

이미 SF를 통해 만났던 익숙한 개념들이다. SF의 상상력과 과학의 진보는 함께 굴러가는 수레바퀴와 같다. 다이제스트 소설로 10대 소년 독자들의

꿈을 장악한 SF는 전통적으로 만화와 가장 잘 어울리는 장르의 하나였다. SF의 광대한 상상력은 독자의 창발성과 조우하며 소년 시절의 삶을

풍요롭게 했다. 90년대 들어 판타지 장르가 양적으로 팽창하며 SF와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었지만 SF는 자신을 사랑하는 독자와의 소통을 멈추지

않았다. 열악한 환경에서 한두편씩 제출되는 SF는 팬들의 목마름을 달래주었다. 이태행의 <타임시커즈>나 김진의 <푸른포에닉스>는

90년대 SF만화가 일궈낸 소중한 성과들이다.

통일 이후, 있을 법한 이야기

SF의 연대인 2001년, 탁월한 만화적 상상력을 소유한 젊은 작가 고병규는 한국 SF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 <건비트>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스토리 작가 전진석은 통일 이후의 한국이라는 있을 법한 시대 위에 보편성을 살린, 그리고 판타지에 가까운 SF들과 차별되는 스토리를

구성했다.

가까운 미래의 통일한국은 충분한 준비과정 없이 갑작스레 이루어진 통일로 인해 엄청난 혼란을 겪게 된다. 통일 이후 영세중립국으로의

전환과정에서 형성된 사회불안(북한의 통일 반대주의자들의 북조선임시정부수립과 같은)이나 남북한 주민의 극심한 빈부격차 등의 문제는 불법으로 흘러나온

중화기로 무장한 강력범죄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통일 당시 막대한 비용을 소모한 연방정부는 이런 강력범죄에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부족한 경찰력을

보강하기 위한 민간경비회사가 생겨났고, 경비회사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요원 ‘건비트’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건비트>에서 SF적 상상력은 이처럼 우리를 둘러싼 사회, 경제, 문화 등 다양한 요인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현실로 변화한다. 맞지

않는 어색한 옷이 아니라 우리 몸에 꼭 들어맞는 맞춤옷을 입은 모양이다.

단행본 1권에 소개된 에피소드는 전 주한미군 출신 무기밀매 브로커인 헥스의 탈출을 둘러싼 이야기다. 광호가 속해 있는 회사는 자신들이 운영하는

교도소로 헥스를 이송하게 된다. 이 이송을 광호가 담당하는데, 호송중에 헥스가 탈주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국가정보원은 헥스의 탈출을 도운 용의자로

중국 내전에 용병으로 참전한 전 주한미군 존 클로, 헥스에게서 살인을 배운 중국계 살인청부업자 티엔 씽과 함께 광호를 지목한다. 헥스 일당은

광호의 동료 차대철을 전면에 내세워 한국은행을 장악하고 ‘북조선임시정부’의 수립을 발표한다. 국가정보원 비밀사무실을 탈출한 광호는 한국은행으로

들어가 차대철과 맞선다. 한편, 광호의 짝인 지현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헥스에게 살해당한 기억이 있다. 우연히 한국은행에 들어간 지현은 헥스와

맞선다.

한국, 하드보일드 액션의 배경

<건비트>는 묵묵하고 터프하지만 정이 많은 북한 특수부대 출신 광호와 차분하면서도 이성적인 지현이라는 짝패가 주인공이다.

귀엽고 기계류에 능통한 지원담당 하루카와 돈을 밝히는 듯하지만 끈끈한 정의 소유자인 과장이 버디 액션물의 익숙한 컨벤션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할리우드 영화나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발견하는 익숙한 컨벤션에 바탕한 하드보일드 액션이 남산 케이블카, 한국은행 등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건비트>의 장점 중 하나는 한국을 배경으로 한 하드보일드 액션만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우리 만화에서 보이는 액션이란

학원에서 벌어지는 주먹다짐 아니면 건달들의 과장된 혈투가 고작이었다. 주로 대본소에서 소비되는 서울을 배경으로 한 액션 만화들은 서울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를 그리기보다는 뉴욕이나 시카고의 총격전이나 도쿄나 홍콩 갱의 모습처럼 우리에게 이미 익숙해진 것들을 ‘서울’이라는 배경에 억지로

끼워맞추는 것에 불과했다. 반면, <건비트>는 디테일의 완성도를 바탕으로 서울에서 벌어지는 액션의 현실감을 극대화했다. 북한 출신

광호에 대한 남한 정보원의 의심, 북조선임시정부수립 기도, 통일자금으로 비축된 금괴, 통일의 폐해를 선동하는 정치인, 무기밀매상으로 변신한

주한미군 등의 모습은 있을 법한 미래의 모습이다. 이런 디테일이 액션의 재미를 끌어간다.

홍보문구처럼 짧게 표현하자면 <건비트>는 근미래의 있을 법한 설정에 기초한 매력적인 SF이자 장르 컨벤션에 충실한 하드보일드 버디

액션물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작화를 담당한 고병규는 <먹통 X> <파이팅 브라더스>와 같은 유쾌한

패러디 만화를 창작한 작가다. 어떻게 만화를 그려야 독자들에게 재미를 선사하는가를 알고 있는 고병규는 <건비트>를 통해 자신의 작품세계를

넓혀놓았다. 2권이 기다려진다.

박인하|만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