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들도 질투를 했던 것일까? 큐피트가 어느 날 장미의 아름다움에 반해 키스를 하려는 순간, 꽃에서 벌들이 튀어나와 그의 입술을 쏘아버렸다.
화가 난 큐피트의 어머니, 비너스는 그 벌들의 침을 장미 줄기에 붙여버렸는데, 이것이 결국 장미의 가시가 되었다. 장미를 사랑한 벌들은
결국 영원히 그 장미에 붙어, 장미를 탐하는 키스를 막고 있는 것이다.
첫키스, 무섭고도 강압적인
만화 속의 주인공들도 진정한 사랑을 확인하는 키스의 목전에서 방해를 받기 일쑤다. 잔혹한 라이벌에 의해 얼굴에 화상을 입기도 하고, 운명의
장난으로 멀어져 가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손바닥 키스를 날리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기억 속에 떠오르는 최고의 방해꾼은 역시 알량한
심의의 가위질이다. 불과 5, 6년 전만 해도 사랑에 불타는 두 주인공의 입술 위에 의미없이 올라붙은 검은 막이나, 기묘한 효과 선을 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입술이 닿는다’는 사실에도 강박적인 불쾌감을 표시해온 몇몇 어른들 때문에 수많은 만화 독자들은 스스로 상상의 입술을
내밀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점점 베일은 벗겨지고 있다. 영화 <시네마천국>처럼 잘려나간 키스장면만을 모아 한편의 만화로 엮어보면
어떨까?
역시 로맨스 만화를 먼저 들추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국내에 로맨스 만화가 폭풍우처럼 밀려왔던 70년대, 운명의 주인공들이 가장 얇은살갗을 서로 맞추는 그 순간에 소녀들은 얼마나 전율을 느꼈는가? 그런데 그 첫 키스들이란, 왜 그렇게도 강압적이고도 무서웠던지?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 오스카를 가까이 두면서도 언제나 친구 이상을 넘어서지 못해 가슴아파하던 앙드레. 드디어 “너를 사랑해왔다”고 고백하며 입을
맞추는데. 그 한순간은 너무나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몰아온다. 당혹감에 앙드레를 밀치는 오스카, 한번 쏟아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오스카의 옷을 찢는 앙드레. 그러나 그녀는 냉담하게 고개를 돌리며 눈물을 흘리고, 앙드레는 손을 놓고야 만다. <캔디캔디>는
또 어떤가? 아직 죽은 안소니와의 추억에 사로잡혀 있던 캔디, 오월 축제의 무도회에서 테리우스와 춤을 추다 말한다. “이 곡, 안소니와
처음 춘 곡이야.” 그러자 화가 난 테리우스, 입을 꼭 다물더니 다부진 힘으로 캔디의 입술을 덮는다. “불량배”라며 뺨을 때리는 캔디.
그러자 테리우스 역시 그녀의 뺨을 사정없이 때린다. “안소니라면 다른 키스를 했다는 건가? 아무리 불러도 그 녀석은 올 수 없어.” 그리고
그녀를 강제로 말에 태우고 안소니가 죽은 그 기억을 통과하도록 한다. 아무래도 앙드레보다는 테리우스가 한수 위였던 것이다.
철이와 메텔은 정말 키스를 했을까?
한순간의 키스로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던 시대. 그러나 그 시절 금단의 황금지대에는 더욱 격렬한 키스들이 벌어지고 있었다.<바람과 나무의 시>에서 ‘소악마’ 지르벨은 자신을 돌봐주러온 세르쥬를 단숨에 자신의 체취로 마비시키고, 진한 키스로 감염시킨다.
그것은 단순한 ‘애정의 증표’가 아니라, 금지된 육욕과 쾌락의 세계로 안내하는 붉은 문이다. <포의 일족>에서 흡혈 미소년 에드가가
앨런의 목에 입을 갖다대는 그 순간 역시, 가볍지만 치명적인 키스 마크를 만든다. 그것은 인간 앨런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영원한 젊음을
누리는 흡혈귀의 삶으로 들어서는 의식과 같은 것이다.
소년들의 꿈 속에서도 키스는 환상의 별처럼 하늘 높이 가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은하철도 999>의 철이는 신비의 여인 메텔과
여행하며, 가끔 그녀의 알몸을 눈요기하지만 육체적인 친밀감의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소년 철이가 테리우스나 앙드레처럼
메텔의 입술을 뺏을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언젠가 한번쯤 메텔이 철이에게 서비스해주지는 않을까? 역시 마지막 편에 실현이 된다. 좀 이상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기계 제국의 여왕에 의해 나사모양의 기계 몸이 되어버린 철이. 메텔은 눈물을 흘리며 그 나사 몸에 입을 맞춘다.
그러나 그 나사는 친절한 마노 씨에 의해 바꿔치기 된 것. 결국 메텔은 철이에게 키스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메텔의 루주가 묻은 붉은 나사는 기계 제국을 붕괴시키는 촉발점이 된다. 그리고 드디어 이별 인사를 하는 순간, 메텔은 진짜 철이에게 키스를
해준다.
금지된 행위가 아닌 ‘용기’의 증표
시간이 흐르며 키스라는 것이 상식적인 것이 되면서, 별달리 진한 감정을 쏟아붓게 만드는 경우를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 80년대 만화인 <토이>에서는미소년 토이와 미소녀 소노코가 카페에서 키스하는 장면을 사람들이 ‘용감하다’며 부러운 눈초리로 쳐다본다. 그걸 쳐다보는 소녀 니야는 “나도
토이하고 키스하고 싶어, 좋겠다, 좋겠다, 좋겠다…”를 연발한다. 이제 첫 키스의 짜릿함보다는 남의 눈치보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키스하는
자유분방함이 사랑받게 된 것이다. <동경대 이야기>에서는 무라카미가 다른 남자에게 미즈노를 뺏기지 않기 위해 초인적으로 풀숲을
헤치고 달려가 그녀와 첫 키스를 나눈다. 온몸에는 나뭇잎과 핏자국이 덕지덕지, 분명히 처절하다 못해 우스꽝스러운 모습. 하지만, 그들이
너무나 열정적이고 진지하게 키스를 나누는 장면을 보고 라이벌과 친구들은 열렬한 박수를 쳐준다.
남의 키스장면을 보는 것은 민망하기도 한 일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에서 크리스마스 파티에 늦게 도착한 마사무네의
동생들은 형과 노조미 엄마의 키스장면을 보고 자리를 피해준다. 그러나 <울어라 휘파람새>의 주인공은 참지 못한다. 공공장소에서
러브러브한 장면을 연출하는 녀석들은 피범벅을 만들어준다. 그들이 너무 못생겨서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명석|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중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