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책이 나왔다. 4쪽짜리 만화 30편을 모은 작은 책이다. 그 책 안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들만 남아 농사를 짓는 옛동과 이제 막 새로운 전원주택으로 조성된 새동이 모인 임화면 야화리가 있다. 가운데로 들풀이 우거진 비포장 도로가 있고, 작은 개울이 있으며, 미루나무 길도 있다. 그리고 그 길에 ‘빨간 자전거’를 탄 우편배달부가 다닌다. 모자를 눌러쓰고 멜빵을 멘 우편배달부는 편지보다는 고지서를 더 많이 배달하지만 그보다 더 큰 사람과 사람의 이야기를 전한다. 슬픔도, 기쁨도, 아픔도, 웃음도 모두 작고 소박하게 그린다. 크게 소리치지 않고 웃지도 않는다. 입가에 빙긋이 미소가 떠오르게만 만든다. 내용뿐만 아니라 작화도, 채색도 소박하다. 그래서 이 책은 ‘작은 책’이고 ‘착한 책’이다.
꿈꾸는 작가, 작가의 꿈
김동화는 꿈을 꾸는 작가이며, 그 꿈을 조금씩 이루어가는 작가다. 조각 같은 미모의 조형미가 넘치는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만화(<아카시아> <목마의 시> <레오파드> <영어선생님> 등)로 80년대 소녀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작가가 <요정 핑크>를 통해 소년독자들과 크로스오버를 시도하고, 그뒤 <곤충소년>으로 완전히 소년독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90년대 들어 <황토빛 이야기>나 <못난이> <기생 이야기>에서는 성인 남성독자들과 은밀한 섹슈얼리티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천년사랑 아카시아>처럼 예전의 작품을 새롭게 그려 어린 소녀 팬들에게 보여주기도 했고, 단편문학을 만화로 그리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이런 다채로운 행보를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는 바로 ‘꿈’이다.
<빨간 자전거>는 김동화가 새롭게 준비하는 꿈이다. 그는 자신의 만화를 평범한 어른들에게 읽히는 방법을 고민했고, 신문 연재에 맞는 4쪽짜리 포맷을 연구하고, 컴퓨터 작업을 통해 색을 입힌 뒤 완성된 만화를 들고 연재가 가능한 매체를 찾아나섰다. 연재가 시작되고 난 뒤 그는 “아줌마들에게 팬 레터를 받는다”면서 환하게 웃었다.
김동화의 작은 소망을 이 책에서는 ‘행복한 어른 만화’라는 카피로 드러냈다.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착한 눈으로 타인을 관찰하는 우편배달부의 따뜻한 마음은 지난해부터 출판계에서 크게 성공한 작은 미담류 수필의 연장선이다. 한 발자국 다른 쪽으로 발걸음을 돌리면 평범한 사람들의 감동적인 에피소드를 애니메이션으로 옮긴 가 있다. 이들 작품에는 지나친 훈계나 강요된 감동보다는 작고 잔잔한 생활의 에피소드가 있다.
<빨간 자전거>는 길 위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착하게 생긴(염색한 꽁지머리가 작가와 닮아보이는) 우체부는 늘 자전거와 함께 길 위에 있다. 표지를 장식한 꽃밭은 물론 거의 모든 작품에서 배경이 모두 드러나는 풀숏이 등장한다. 상업잡지에 연재되는 대부분의 만화들이 주로 클로즈업을 통해 캐릭터를 칸 안으로 끌어들인 뒤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 비해, <빨간 자전거>는 캐릭터를 공간에 머무르게 한 뒤 이야기를 끌고 간다. 이 작품은 다른 상업만화들과 달리 공간(혹은 배경)과 캐릭터가 함께 이야기를 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화 기법은 <황토빛 이야기>에서 선보인 것이다. 소녀 이화가 시골길을 걸어가거나, 작은 개울을 건너는 장면은 커다란 칸에 풀숏으로 인물을 묘사했다. 근경에서 원경까지 충실하고 꼼꼼하게 묘사되지만, 어떻게 보면 동양화처럼 평면적인 묘사로 보이기도 한다. 인물은 배경에 존재하고, 배경은 적극적으로 발언한다.
예쁘다, 착하다
<빨간 자전거>에서는 좀더 적극적으로 인물과 배경이 함께 이야기를 끌고 간다. 구체적인 배경이 개입되지 않는 이야기가 찾기 힘들 정도로 첫 칸이나 중간, 마지막 칸에 배경이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그 안에 빨간 자전거와 우체부가 그려진다. 이것은 독자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한다. 독자와 캐릭터 사이에 배경이라는 층위가 개입되는 것이다. 배경은 이야기를 끌고 가는 역할과 함께 캐릭터에 동일시되려는 독자들에게 일정한 거리를 제안한다. 작가는 배경의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자신이 묘사한 만화의 공간인 임하면 야화리가 현실적으로 보이지만(세세한 배경 묘사로 인해) 사실은 비현실적인 공간(세세하게 묘사된 배경이 캐릭터의 이야기에 개관적인 거리를 부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임하면 야화리는 성인독자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공간과 사람들이 모인 이상의 공간이다. 작가는 이 공간의 이름을 ‘고향’이라고 부른다.
거대한 감정의 변화는 없다. 하지만 이 만화에는 이제는 우리 곁에서 사라진 느릿하게 사랑을 전해 주는 우편배달부 자전거가 있다. 책으로 묶인 <빨간 자전거>를 다시 보니, 이 만화는 30이 넘은 어른들을 위한 팬시상품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컴퓨터를 이용한 채색테크닉은 예전 작품에서 보여준 김동화 특유의 섬세한 펜 선을 가린다. 컴퓨터로 색을 칠하기 위해 선이 간략해졌기 때문이다. 아쉬운 일이다. 컴퓨터라는 오브제는 효율성에서 뛰어나도 인간의 냄새를 담아내기는 어렵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예전 작가의 만화를 좋아했던 사람들에게 몇몇 아쉬운 점들이 눈에 띄겠지만, 그래도 이 만화는 참 예쁘고, 착하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