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Culture > 초이스 > 도서
화면 가득 따스한 숨결
2001-04-19

해외 만화애니 | 조지 슈비츠게벨

‘움직이는 그림.’ 애니메이션의 일본식 표현 ‘동화’(動畵)란 말을 의미 그대로 풀어보면 이런 말이 된다. TV 시리즈나 극장용 장편에서 가장 널리 애용되는 ‘셀 애니메이션’을 애니메이션의 전부로 여긴 발상에서 등장한 말인데, 최근 들어 거의 쓰이지 않는 구시대의 단어가 됐다.

특히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고 하나의 예술 분야로 진지하게 여기는 이들에게 ‘동화’는 ‘만화영화’와 더불어 무지와 촌스러움의 상징이다. ‘아니 그 넓고 다양한 영역의 애니메이션을 ‘동화’라는 말로 한정하려고 하다니….’

사실 그동안 이 지면에 글을 쓰면서 가급적 ‘만화영화’ 같지 않은, 또 ‘동화’와는 거리가 먼 작품을 소개하려고 애를 썼다. 나 역시 김준양씨가 그의 책에서 썼던 것처럼 애니메이션은 ‘영화’(film)의 한 장르로 봐야 된다고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번에 소개하는 작가는 어떤 면에서 동화의 단어적 의미, 즉 ‘움직이는 그림’이란 표현이 가장 잘 맞는 작품을 제작해온 인물이다.

조지 슈비츠게벨(Georges Schwizgebel)은 스위스 출신의 애니메이션 작가이다. 44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치면 올해 57세. 65년 제네바의 ‘아트 스쿨 앤 컬리지 오브 데코레이티브 아츠’(Art School and College of Decorative Arts)를 졸업한 뒤 한동안 광고 회사에서 근무했던 그는 70년 동료 클라우드 뤼엣, 다니엘 수터 등과 ‘GDS 스튜디오’를 설립해 독립 애니메이션 작가로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GDS 스튜디오에서 TV 프로그램 타이틀, 포스터, 광고 등을 제작하는 틈틈이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30년이 넘는 작품활동을 통해 그동안 유럽의 여러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수상을 했고, 최근에도 <푸가>(Fugue)를 발표하는 등 50대 후반의 나이에도 정력적인 작품활동을 하는 유럽의 대표적인 애니메이션 작가 중 한명이다.

하지만 그를 굳이 여기서 언급한 것은 오랜 작품활동이나 만만치 않은 수상경력 때문은 아니다. 조지 슈비츠게벨의 작품에선 공통적으로 ‘그림’이 갖는 회화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단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작가들의 작품 중에는 내용을 떠나 ‘그림’ 자체만으로 보는 이를 압도하는 경우가 있다. <노인과 바다>의 알렉산더 페트로프나 <나무 심은 남자>의 프레데릭 벡이 대표적인 예이다.

하지만 조지 슈비츠게벨의 작품은 앞선 두 작가와는 조금 다르다. 페트로프나 벡이 자신의 주제를 위해 ‘그림 같은’ 영상을 선보인다면, 슈피츠게벨은 한폭의 미술작품에 담겨 있는 작가의 영감과 감성을 애니메이션이란 유한한 시간의 공간 위에 펼친 듯한 느낌을 준다.

내용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강하고 힘찬 터치와 두툼한 질감이 느껴지는 영상을 가지고 있다. 마치 방금 튜브에서 물감을 짜서 캔버스에 나이프로 바른 듯 슈비츠게벨의 애니메이션에서는 색과 선 자체가 생동감을 갖고 있다. 그는 이런 화면 가득 배어 있는 ‘손맛’을 살리기 위해 인물의 얼굴이나 표정을 비구상화에 가깝게 단순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보다보면 어떤 때는 후기 인상파 화가 마티스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가질 때도 있다. <`Perspectives`>(75)나 <`Hors-Jeu`>(77)는 슈비츠게벨의 그런 특징을 잘 느낄 수 있는 초기 대표작들이다.

하지만 ‘그림’ 자체의 강한 이미지가 그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매력의 전부는 아니다. 뚜렷한 스토리라인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슈비츠게벨의 작품에는 삶을 사랑하려고 애쓰는 따스함이 배어 있다. 좌절과 고독, 대화의 단절을 소재로 즐겨 다루면서도 그가 내리는 결론은 늘 긍정적이다. 낙천적이거나 익살맞지는 않지만, 슈비츠게벨의 작품에선 삶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달관한 시각이 느껴진다.

사실 특별한 사건이나 다양한 플롯이 없이 조금은 밋밋한 느낌을 주는 내용 때문에 그의 작품은 종종 “지루하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굳이 작품 안에서 어떤 메시지나 정보를 찾으려고 하지 않고 그냥 눈앞에 펼쳐지는 ‘움직이는 회화’의 즐거움을 느끼려고 마음먹는다면 슈비츠게벨의 작품만큼 매력적인 애니메이션도 드물다. 김재범 | 동아닷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