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그나마 분단되어 4면이 막힌 한반도 남쪽에서 사는 내게 ‘중국’은 아주 어릴 때부터, 상상이 만주에 미처 이르기도 전에 대륙의 파란만장한 깊이를 느끼게 했지만 ‘일본’이 내게 모종의 ‘충격=감동’적 실감으로 온 것은 약 5년 전, 나이 40을 넘기고서다. 프랑스 라루스 테마 백과사전 ‘예술과 문화’편을 뒤지다가 마주친, 약 1천년 전에 출간된 무라사키 부인의 ‘세계 최초-걸작 소설’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 삽화는, 명징한 색깔과 명징한 모양의 결합이 달하는 또한 명징한 깊이가, 개방된 성(性)으로서 색이 예술로서 색과 상호교통하는 통로를 응축하는 듯하여, 내 눈과 감각이 유교민족주의에 찌들어 있다는 점을 단박에 깨닫게 했다.
이러한, 일본적 일상의 ‘색과색’은 정치지상화할 경우 잔혹한 ‘육체성’을, 예술지상화할 경우 ‘죽음의 탐미주의’를 낳지만( <바람의 검심>은 그 결합이다), 일본 만화는 이것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만화적 상상력으로 일상을 다시 한번 일상화, 대체로 양극단을 은폐하거나(<몬스터> 계열) 완화하거나(<시마 과장> 계열>, ‘일상의 깊이’로 전화하는(<초밥왕> 등) 세 가지 방식을 완벽하게 구사하면서 ‘만화 왕국’의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천황을 알아야 일본이 보인다>는 맥락이 전혀 다르다. 위 세 가지 맥락이 우파 혹은 중도우파적이라면 이 만화는 단연 사회주의적이다. ‘그림’과 ‘드라마’는 너무 단순하고 줄거리도, 전일본대학 축구대회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고도 ‘국가도 따라하지 않고 국기에 경례도 붙이지 않’은 ‘불경’ 때문에 축구계에서 추방될 위기를 맞은 스미카와 진이 천황제의 폐해와 천황제 철폐의 당위를 ‘몸으로’ 깨달아가는 과정에 불과하지만 각주형식으로 붙은 ‘해설’은 어지간한 일본 근현대사 못지않게 자세하고 해박하고 적절하여 사회과학적 일반성을 득한다. 그리고 이 일반성이 아연, 일제 잔재가 ‘본토 일본’보다 더 뿌리깊게 남아 있는 남한 현실의 폐부를 찌른다.
사회주의적 일반성이 만화-예술적 일상성에 달하는 장면을 목도하려면 우리는 좀더 기다려야 한다. 이 책은 튼튼한 출발점이다. 이 책을 펴낸 천희상은 번역자로 실한 명성을 쌓다가 출판에 투신, 7∼8년 동안 진지해서 (당연히) 안 팔리는 책 출판을 고수해온 사람이다. 80년대에는 누가 출판사를 때려치우면 친구들이 차라리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경우가 많았다. 이제 그 숫자는 다섯이 채 안 된다. 이 책이 또한 ‘세계인’ 천희상의 튼튼한 출발이 되기를 비는 까닭이다. 김정환/ 시인·소설가 maydapoe@thrune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