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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상상력, 순진한 정책
2001-04-12

애니메이션의 마이너 레이블, 폴리마지

‘갈로, 낙소스, 다이나믹, 산도스 아를레키노, 아르무니아 문디, 하이피리언, 프라지어, 뱅가드.’

어지간한 클래식 음악 애호가가 아니라면 꽤 낯선 이름일 것이다. 이들은 모두 클래식 음반을 내는 대표적인 마이너 레이블이다. 도이치그라마폰이나 데카, EMI 등 쟁쟁한 대형 음반사의 틈바구니에서 이들이 버틸 수 있는 것은 자신들만의 레퍼토리 개발과 메이저 레이블이 따라올 수 없는 전문성.

예를 들어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마이너 레이블 아를레키노는 복각 전문 레이블로 유명하고, 아르무니아 문디와 하이피리언은 르네상스와 바로크 음악에서는 다른 어떤 음반사도 감히 따라오질 못한다. 오스트리아 음반사인 프라이저는 성악가 시리즈로 유명하다. 어찌보면 틈새시장을 공략한 것일 수도 있지만 무조건 대상을 넓히지 않고 자신들만의 고유한 영역을 개발해 전력투구한 이들 회사들은 ‘큰 것이 통한다’는 규모경제의 논리 속에서도 ‘작지만 힘있는’ 음반사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애니메이션도 마찬가지다. 세계시장을 호령하며 수천만달러의 수익을 올리는 월트 디즈니, 한나 바버라, 클라스키 추포, 도에이 등이 있는가 하면 장사도 별로 되지 않을 것 같은 분야에서 예상 외로 꿋꿋이 잘 버티는 회사도 있다.

프랑스의 애니메이션 프로덕션 ‘폴리마지’(Folimage)는 애니메이션계에서 대표적인 마이너 레이블이다. 84년 애니메이션 작가인 자크 레미 지라드가 설립한 이래 큰돈 벌 수 있는 극장용 장편, 비디오물 보다는 TV시리즈나 단편, 교육용 애니메이션에 주력해오고 있다. 물론 TV시리즈를 제작하는 애니메이션 프로덕션이야 많지만, 폴리마지의 특징은 그와 함께 30분 미만의 순수 단편 애니메이션에 들이는 공이 보통이 아니라는 점. 그동안 이 회사에서 제작한 단편 애니메이션이 각종 영화제나 페스티벌에서 수상한 횟수만 50회가 넘는다. 이 지면을 통해 소개했던 미하일 두독 드 비트의 <수도사와 물고기>, 캐서린 부파의 <침묵>, 콘스탄틴 브론지트의 <세계의 끝> 등이 모두 이 회사에서 제작한 단편 애니메이션이다. 이 밖에 사장인 자크 레미 지라드가 제작한 <찰리의 크리스마스>와 <대이주>도 해외 페스티벌에서 수상한 폴리마지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폴리마지의 단편은 엽기적이거나 자극적인 소재보다는 깔끔하면서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한 내용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엄숙한 작가주의보다는 애니메이션 특유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최대한 살리도록 배려하는 것도 이 회사 작품의 특징 중 하나이다.

폴리마지의 회사운영 원칙은 간단하지만 분명하다. ‘작가와 창의력은 상업적인 목표보다 우선한다.’ 과연 ‘윈도 효과’니 ‘원 소스 멀티 유즈드’라는 이윤을 극대화하는 온갖 마케팅 정책이 판을 치는 애니메이션계에서 이렇게 ‘순진한 정책’으로 어떻게 살아남을까 싶지만, 폴리마지는 승승장구하고 있다. 그 흔한 캐릭터 상품이나 게임에도 눈을 돌리지 않고 고집스럽게 단편 제작에만 매달리면서도 해마다 회사는 크게 성장하고 있다. 이제는 순수 애니메이션계에서 ‘폴리마지’라는 브랜드는 하나의 문화 권력으로 통한다.

93년부터는 해마다 두명의 애니메이션 작가에게 작품 활동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고, 99년에는 젊은 애니메이션 작가를 양성하는 애니메이션 학교 ‘La Poudriere, Animated Film School’을 운영하고 있다.

하나 더, 전에 이 면을 통해 소개했던 미셸 두독 드 비트가 <아빠와 딸>로 바라던 대로 아카데미 최우수 단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했다. 이제는 한국에 소개될 일만 남았는데, 많은 애니 페스티벌을 준비하는 곳에서 설마 아카데미 수상작을 외면하지는 않겠지.

김재범/ 동아닷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