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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을 먹고 자란 고담시
2001-04-12

쾌락의 급소 찾기 28 - 가장 멜랑콜리한 뉴욕 스토리는?

뉴욕은 우디 앨런의 도시. 그러나 그의 것만은 아니다. 그곳은 수많은 영화인과 시인, 화가, 가수, 디자이너들의 꿈이 뒤얽혀 있는 곳이다. 20세기의 뉴욕은 그야말로 세계 문화의 수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우리가 즐겨 보는 동아시아의 만화에서조차 뉴욕이라는 도시가 빈번히 출몰하는 것은 이상스럽다. 왜 그처럼 많은 만화가들이 자신의 도시를 놔두고 저 이국의 도시를 그리려고 노력했을까? 뉴욕은 이미 실제의 모습을 넘어서 온갖 상상이 얽혀져 자라난 <배트맨>의 ‘고담’시와 같이 되어버린 것이다. 동아시아의 영화감독들은 단지 꿈밖에 꾸지 못하는 ‘뉴욕이야기’를 만화가들은 초저예산으로 그려나가고 있다. 80년대 이후 일본 여성만화에서는 유럽의 공주이야기를 대체할 새로운 환상이 필요했다. 좀더 감각적이고 풍요로운 세대에 맞춰 현대적인 스타일을 담아내고, 그러면서도 온갖 빛깔의 무지개로 채색된 환상을 그려낼 수 있는 공간. 아름다운 뮤지컬과 다채로운 이민족의 도시, 뉴욕은 그 제일의 적지로 선택되었다. 그로 인해 다양한 만화가들이 저마다의 ‘뉴욕 스토리’를 그려냈다. 팔등신의 백인 남녀가 공주와 왕자 역할을 대신하고, 가끔은 낯선 도시를 찾아간 동양계 소년소녀가 뉴욕이라는 현대의 귀족사회에 들어가 신비로운 체험을 하기도 한다. 동화와 SF가 뒤섞인 신비로운 판타지 <달의 아이>에서 우주를 유영하는 인어 벤자민이 찾아가는 도시도 뉴욕. 그녀는 그곳에서 뮤지컬 댄서인 아서를 만난다. 아파트 창가에서 달빛을 받은 소년이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신하고, 인어의 초능력에 의해 고층 빌딩 사이로 거대한 물고기떼들이 헤엄을 치는 등, 뉴욕이라는 대도시는 현대의 동화가 펼쳐지는 무대가 된다. 그곳에 사는 젊은이들만이 그 환상의 세계에 동참할 가치가 있다는 듯이.

적당한 슬픔, 적당한 기쁨

박희정의 <호텔 아프리카>와 같은 우리 만화에서도 뉴욕은 나름의 환상을 펼쳐낸다. 20대 젊은 예술가들이 자유롭게 사랑과 꿈을 나누는 공간. 흑인 혼혈이든 동양인이든, 동성애는 물론 어떤 금지된 사랑도, 모든 것이 아름다움으로 용납된다. 아직 성공하지 못한 예술가 지망생들의 처량한 삶의 조각까지도 애절한 상실의 환희로 반짝인다. 한편으로 그들이 겪어온 지난 과거와 병치된 뉴욕은 현대와 고독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적당한 슬픔’이라는 멜랑콜리의 정서가 모든 것을 덮어주고 있다. 빛나는 도시, 아직 그 도시의 꼭대기에 오르진 못했지만, 함께 꿈을 향해 달려가는 젊음은 아름답다. 대단히 현실적인 어조로 전개되는 <시마과장>의 뉴욕 에피소드에서도 이 도시는 적당한 페이소스와 적당한 기쁨이 서로 스며들어 있는 멋진 칵테일로 그려진다. 시마 고우사쿠의 여성 편력은 이곳에서도 자유로운 섹스관을 지닌 금발의 미녀와 얽히게 되고, 그녀의 또다른 애인인 흑인 남자와 함께 만들어가는 삼각의 연애는 뉴욕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브로드웨이의 배후에서 벌어지는 암투조차 세계 최고 문화 속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일본인의 자긍을 보여주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뉴욕은 예술과 자유 연애의 도시인 것만은 아니다. 그 거대한 고층 빌딩 아래 썩어가고 있는 미국 자본주의 최악의 오물들 역시 무시 못할 존재이다. 80년대 가장 카리스마적인 여성만화가 요시다 아키미는 동시대의 뉴욕 판타지를 정면으로 거부한다. 그녀는 이미 초기작 <캘리포니아 이야기>에서 꿈의 나라 아메리카의 깊고 깊은 그림자를 탐색한다. 캘리포니아에서 뉴욕으로 이주해온 주인공의 눈에 비친 아메리카는 인종, 마약, 강간 등 온갖 폭력의 문제로 얼룩진 암흑의 도시다. 요시다는 오오토모 가쓰히로(<아키라>)의 그림 스타일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는데, 오오토모 역시 <사요나라 일본>에서 미국으로 이민간 일본인과 그곳의 다른 이민들간의 문제를 매우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

도시 뒷골목, 음모와 상처가 있는 곳

요시다의 장편 <바나나 피쉬>는 좀더 밀도있게 이 뉴욕이라는 도시를 파고들어간다. <사요나라 일본>이 다소 쿨한 시각으로 담담히 그 세계를 탐색하고 있다면, 그녀의 만화는 주인공을 비극의 극단으로까지 몰고가면서 그 도시가 안고 있는 극한의 문제까지 파고들도록 만든다. <바나나 피쉬>에서는 뉴욕의 십대 스트리트 갱으로 살아가는 애쉬를 주인공으로 뉴욕 마피아와 정계의 거대한 음모를 파헤쳐 나가고 있다. 이곳을 찾아온 일본인 소년 에이지는 한편으로는 애쉬의 닫힌 마음을 들여다보는 유일한 열쇠로, 다른 한편으로는 꿈의 도시 뉴욕의 어두운 뒷골목을 탐색하는 카메라로서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애쉬가 죽은 이후에 다시 그곳을 찾아와 사진을 찍은 에이지는 자신의 운명을 ‘존속하는 도시의 비극’을 찍는 카메라로 고정시키고 있다.

제목에서부터 그 거대한 이름을 겹쳐 쓰고 있는 라가와 마리모의 <뉴욕 뉴욕>에서도 이 도시는 비극과 상처가 모여 있는 곳이다. 이 작품은 동성애자인 경찰 주인공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밀도있고 애절하게 그려나가고 있다. 가와하라 유미코(<나만의 천사>)의 <솔저 보이>에서도 뉴욕은 버려진 동양계 여자아이가 좀도둑질로 연명해가는 도시다. 계정순의 <거울의 저편>에서도 뉴욕은 이민족이 뒤섞인 범죄의 소굴이며, 매춘, 강간, 강도, 그리고 무분별한 폭동으로 잃어버린 꿈들이 마지막 발악을 하다가 죽어가는 곳으로 그려진다. 만화 속에서 뉴욕은 그렇게나 거대한 명암으로 조형된 극적인 도시다. <펫숍 오브 호러즈>의 D 백작이 자신의 가게를 뉴욕의 차이나타운에서 열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을까?

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중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