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 어린 소녀들의 눈동자는 공허한 듯 맑다. 희로애락에 연연하지 않는 듯 무표정한 얼굴은 세상과 타인에 대한 호기심이나 긴장감 등 감정의 미세한 떨림을 섬세하게 드러낸다. 대강의 스케치 과정을 생략한 채 곧바로 캔버스에 붓을 대고 그려낸 담백하고 부드러운 선과 맑은 색채, 하얀 여백의 트라이앵글이 만들어낸 맑은 시정은 그대로 보는 이를 어린 날 추억의 한 모퉁이로 데려갈 듯 생생하다.
<작은 새가 온 날>과 <이웃에 온 아이>는 일본의 화가 겸 일러스트레이터인 이와사키 치히로의 시화집 가운데 1차분으로 발간된 책. ‘치히로 아트북 시리즈’는 1968년부터 1974년까지 그녀가 직접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 일본의 메이저출판사인 지광사를 통해 1년에 1권씩 발표했던 창작그림책이다. ‘어린이처럼 투명한 수채화의 화가’라는 애칭에 걸맞게 그녀의 작품들은 스케치와 유화 등 서양식 기법과 수묵담채, 서예 등 동양식 기법이 접목해 만들어진 독특한 질감과 색감이 돋보이는 그림.
1972년 볼로냐국제아동도서전에서 수상하기도 한 <작은 새가 온 날>은 고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작은 새와 함께 있고 싶은 소녀의 에피소드다. 그러나 새장에 갇힌 새는 다른 쪽만 쳐다보고, 소녀는 결국 새를 세상 밖으로 날려보낸다. 낙심해 있던 소녀에게 뜻밖에 작은 새가 친구들을 데리고 다시 찾아온다는 것이 줄거리. 간결한 그림체와 투명한 색감으로 소녀의 감성을 드러낸다. <이웃에 온 아이>는 이웃집에 사내아이가 이사온 뒤 옆집 여자아이와 신경전과 탐색전을 벌이다 결국 서로 다가가기까지의 이야기다. 어린 시절 옆집에 또래 아이가 있었다면 누구라도 한번쯤은 체험했을 법한 귀여운 에피소드로, <작은 새가 온 날>의 투명한 서정과는 다른 은은한 파스텔톤으로 채색했다.
원작자인 이와사키 치히로는 일본의 유명한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동시에 일본 공산당원이자 반전·반핵운동가였다. 1918년 건축기사인 아버지와 여학교 선생님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란 이와사키는 스무살에 결혼하지만 데릴사위였던 남편은 1년 만에 자살하고 만다. 또한 일본의 침략전쟁의 실태를 알고 난 뒤 스스로가 가해자라는 죄의식에 시달렸다. 이 두 가지 사건, 즉, 누군가에게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입혔다는 것과 자신의 안락한 삶 뒤에 많은 타국민의 괴로움이 있었다는 것을 안 이와사키는 그전까지의 생활과 결별, 삶의 괴로움과 슬픔을 받아들이는 삶을 결심한다. 일본 공산당에 입당한 이와사키는 <인민신문> 기자를 하며 ‘노동자들도 공감할 수 있는 화가가 되고 싶다’는 일념으로 붓을 들었고, 그뒤 어린이를 평생의 테마로 삼아 어린이들의 행복한 미래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모델을 세우지 않고도 1살배기 아이와 10살짜리 어린이의 차이를 정확하게 묘사하리만큼 예리한 관찰력과 훌륭한 스케치 능력을 가졌던 이와사키 치히로는, 서로 다른 포즈의 아이들을 1천여점이나 그렸다고 한다. 그녀의 그림은 아이들은 물론, 험한 삶에 익숙한 어른들의 마음 한 자락까지 서정을 물들이는 힘을 발휘한다. 책장을 넘기다보면 왜 그녀에게 ‘어린이처럼 투명한 수채화의 화가’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원작자의 의도를 존중하기 위해 문장부호를 삭제하고, 그림의 질감과 색감을 최대한 살리려 비싼 제작비를 감수하며 일본 현지에서 직접 인쇄, 제작을 해낸 출판사의 열정도 대단하다.(프로메테우스 펴냄, 각권 1만원)
위정훈 oscar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