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3월 말이면 일본 도쿄에서는 토이쇼(정확한 명칭은 ‘東京 おもちや-ショ’)라는 것이 열린다. 쉽게 말해
일종의 장난감 페스티벌인데, 우리나라 코엑스 국제무역전시장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큰 공간에서 벌어질 정도니 속된 말로 규모면에서 장난이
아니다. 특히 이 행사는 단순히 완구업체들뿐만 아니라 캐릭터, 애니메이션, 만화, 게임 등 유관산업들의 현주소와 최근 경향을 알 수 있어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이들이 봐도 꽤 유익하다. 올해는 지난 3월21일부터 25일까지 도쿄의 하루미 국제전시장에서 열렸다. 필자 역시 다니던
회사에서 눈총(?)을 받아가면서 억지로 휴가를 내서 일반 관객에게 공개를 하는 토요일 하루미 국제전시장을 갔다.
지난 ‘2000 도쿄 토이쇼’만 해도 행사장은 온통 휴대전화용 게임기 같은 모바일과 관련된 상품이 홍수를 이루었다. 하지만 올해는 다음
주에 ‘도쿄 게임쇼’가 열려서 그런지 몰라도 그런 제품이 자취를 감추고, 전통적인 개념의 완구들이 전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것은 만든 지 20년이 넘은 ‘추억의 명작’들이 당당하게 디지몬과 같은 최신작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는 점이다.
행사장을 들어서면 천장에 보란 듯이 대형 애드벌룬으로 떠 있는 ‘도라에몽’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철인28호>와 <마징가Z> <데빌
맨> 같은 60, 70년대 ‘스타’들이 여러 전시장에서 다양한 상품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새로운 신제품도 있었지만, 어떤 경우는 아예 고색창연한
양철 태엽인형으로 버티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도라에몽>이 도대체 언제 때 작품인가? 70년에 만화책으로 연재가 시작됐고, 방송에서 TV시리즈로 방영된 것도 20년이넘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지금도 일본에서는 인기가 높다. ‘토이쇼’ 때문에 들렀던 도쿄의 한 극장에는 벌써 몇 번째 시리즈인지 횟수도
감감한 <도라에몽>의 장편 애니메이션 신작이 걸려 있었다. 72년에 TV 시리즈가 시작된 <마징가 Z> 역시 벌써 30년 가까이 됐지만
여전히 로봇물의 대명사로 불린다. ‘마징가 Z’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재현한 프라 모델들은 20만원을 넘는 고가품들이다. 63년에 TV에
첫 모습을 드러낸 <철인28호>의 경우에는 아예 40년 가까이 됐다.
하지만 그것들이 지금 세대를 뛰어넘어 그 부모들과 아이들이 함께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대상이 되고 있다. 유선형의 매끈한 몸체를 지닌 로봇에
익숙한 아이에게는 조금 투박하고 어설퍼 보이는 모양이 신기해서, 부모에게는 유년 시절의 달착지근한 추억을 곱씹어볼 수 있는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단순히 과거의 빛바랜 인기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한 시대의 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대접을 받으며 시대를
뛰어넘어 사랑받는 ‘추억의 스타’들은 솔직히 우리가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에 대해 느끼는 가장 부러운 저력 중 하나가 아닐까?
그런 점에서 <플란더스의 개>와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빨간머리 앤>으로 유명한 ‘(주)일본 애니메이션’의 전시장은필자에게 가장 강한 인상을 주었다. 전시장 가운데 걸린, 커다란 유화. 그것은 <플란더스의 개>의 두 주인공 레미와 파트라슈가 다정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 옆에서는 루벤스의 그림을 바라보는 레미의 모습이, 그리고 그 옆에는 햇살 화사한 들판에 앉아 있는 빨간머리 앤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유년 시절 이 애니메이션들을 보면서 흐믓했던 즐거움과 안타까움, 가슴 시린 기억들이 단아한 유화 속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왜 한국의 386세대 아저씨가 바다 건너 일본에서 이런 상념에 젖어야 하는지, 어찌 보면 입맛 씁쓸한 일이다. 김재범/ 동아닷컴 기자 oldfie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