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태어난 프랑수아 부크(Boucq)는 19살에 <르 포앵>에 정치풍자화를 게재하며 프랑스 만화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이다. 미술 정규교육을 받은 적도, 스승에게서 사사를 받은 적도 없는 부크는 데뷔 이후 꾸준히 단편을 발표하며 자신의 이름을
서서히 알려갔다. 사람들에게 부크의 이름을 선명하게 기억시킨 작품은 1984년 발표한 <인간 모험의 개척자들>이다. 이후 부크는 <용감한
자들을 위한 소실점> <거리의 교육> <알약의 보잘것없는 기포> 등을 발표하며 명성을 쌓아갔다. 무엇보다도 그를 세계적인 작가로 만든 작품은
미국의 추리소설가 제롬 차린과 함께 작업한 <마술사의 아내>(La Femme Du Magicien)다. 1986년 알프레드 최고 만화상을
수상하기도 한 이 작품은 부크 특유의 완벽에 가까운 드로잉과 미장센이 환상과 서스펜스를 넘나드는 스토리와 잘 어울려 세계의 만화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지난 2월경 국내에도 번역, 출판됐다.
이후 1994년 <벽을 뚫고 출몰하는 상어>로 시작된 <제롬 무슈로의 모험> 연작은 <뜻밖의 일이라는 괴물을 향해 돌격!>(1998),
<체크무늬 먹장구름>(1998), <나는 보장한다>(1999)로 이어지며 프랑스를 대표하는 만화로 자리매김했다. 이 만화는 1998년 앙굴렘
만화 페스티벌에서 그랑프리의 영예를 부크에게 선사하기도 했다. 국내에는 지난해에 <벽을 뚫고 출몰하는 상어>와 <체크무늬 먹장구름>이 합본되어
출판된 바 있다.
프랑스만화를 대표하는 부크, 그리고 부크를 대표하는 두 작품 <마술사의 아내>와 <제롬 무슈로의 모험>. 이 두 작품은 한 작가의 작품이면서
전혀 다른 재미를 보여주고, 다른 재미지만 결국은 하나의 재미로 모여진다.
차원을 넘어, 한계를 넘어
1999년 앙굴렘 시내를 뒤덮은 벵골 호랑이 제롬 무슈로. 호랑이 옷에 만년필을 코에 꽂은 정글의 야수 제롬 무슈로는벽에서 튀어나온 상어에게서 아들을 되찾아오기 위해 싸우고, 작은 구름과 자동차를 위협하는 체크무늬 먹장구름과도 싸운다. 그의 삶은 유머러스해
보이지만 투쟁의 연속이다. 그래서 그를 둘러싼 공간은 정글이고, 그의 주위에는 인간의 얼굴을 한 야생동물들이 가득하다. 그가 정글에서 살아가는
방식은 바로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부크는 우리의 일상을 제롬 무슈로라는 캐릭터를 이용해 은유보다는 직유를 통해 보여준다. 보여주는
방식은 공간과 차원을 뛰어넘고, 상상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부크 만화의 매력은 규칙과 규범, 한계를 뛰어넘는 데서 시작된다.
제롬 무슈로가 쓰는 말 중 ‘스머프’라는 게 있다. 우리말로 바꾸면 ‘거시기 혹은 머시기’쯤 된다. 거시기를 쓰면 거시기가 튀어나오는 것처럼,
스머프라는 말을 하면 스머프가 튀어나온다. 왜? 그냥 그러니까. 이 만화에서 ‘왜?’라는 의문사처럼 허무한 것은 없다. ‘왜?’라는 질문이
시작되면 이 만화는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에 불과하다. ‘프랑스 사람들은 이렇게 재미없는 만화를 재미있어하네’라는 생각으로 끝이다. 하지만
‘왜?’라는 질문을 지워버리면 만화의 재미에 빠져들어갈 수 있다. 만화를 보면 어처구니없는 느낌조차도 너무 진지하다. 갑자기 스머프가 나오고,
공룡이 나오고, 공룡의 여자친구인 할머니가 나온다. 매머드 스테이크의 피 냄새를 맡고 벽에서 상어가 벽을 통해서 등장하고, 제롬 무슈로의
아들 룰루를 먹어버린다. 위층에 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게이 파트너와 함께 춤을 추고, 말도 안 되는 기계를 타고 제롬 무슈로는 상어가
사는 벽 속으로 들어간다. 벽 속에는 개선문이 있고, 샹젤리제 거리가 있다. 그 틈을 유영하며 상어를 쫓고 은둔자들을 만난다.
제롬 무슈로의 4마력짜리 작은 자동차는 산책을 하다가 대형차들에게 협박을 당해 공포에 떨게 된다. 자동차 정비공은 겁에 질린 차 카르트
슈보에게 자신감을 불어넣고주고, 힘이 넘치는 자동차는 고압선 철탑 위로 길을 떠난다. 고압선 철탑을 달리던 자동차는 백설공주의 일곱 난쟁이를
만나고, 구름 속에 생각을 투사하기도 하며, 거대한 체크무늬 먹장구름에 맞서 작은 연정구름을 구해주기도 한다. 부크의 자유로운 상상력은
철학과 예술이 자유롭게 교차하는 문화적 토양에서 발아하고, 극히 세심한 사실주의적 드로잉과 그래픽을 통해 구현된다.
판타지에서 현실의 서스펜스까지
두 번째 재미는 조금 더 우리에게 낯익은 모양이다. 미국의 대중적 추리소설 작가 제롬 차린의 스토리에서 나오기때문이다. <마술사의 아내>는 부크의 스타일과 차린의 서사가 서로 화음을 맞추는 작품이다. 웬즈데이 모녀는 마술사 에드먼드의 파트너로 함께
살아간다. 리타의 엄마가 늙어버리자 에드먼드는 딸 리타와 결혼한다. 순회공연중 리타의 어머니는 죽게 되고, 리타는 뉴욕으로 도망친다. 한편,
뉴욕의 센트럴파크에서는 사지가 찢겨진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리타는 자신이 늑대인간으로 변해 범행을 저질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친상간에
가까운 미묘한 남녀관계, 어머니의 남자이자 자신이 사랑한 남자에 대한 주인공 리타의 복잡한 심리상태는 마술 혹은 늑대인간이라는 판타지한
설정과 함께 극대화된다. 이런 판타지한 설정은 뉴욕 센트럴파크의 살인사건이라는 실재 사건과 맞물리며 현실의 서스펜스를 조성한다.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이야기는 결말을 위해 작품이 시작한 세러토거 스프링즈로 돌아간다. 그리고 부크 스타일로 이야기를 정리한다.
부크의 만화는 조금은 낯선 모습이다. 하지만 다른 작품에서 볼 수 없는 매력으로 가득하다. 미묘한 심리적 변화와 서스펜스한 설정에 기반한
<마술사의 아내>를 시작으로, 정점에 이른 부크의 매혹을 맞볼 수 있는 <제롬 무슈로의 모험>을 읽어보자. 완벽한 드로잉과 채색은 시각적
즐거움을 더해줄 것이다. 부크의 빼어난 상상력은 우리의 빈약한 상상력에 신선한 자극이 될 것이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