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중·후반에만 해도 서점의 영화서적 코너에는 그리 많지 않은 영화책들 가운데에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나 <영화운동론>, 혹은 <혁명영화의 창조>처럼 영화와 사회(변혁)의 문제를 다룬 책들이 꽤 눈에 띄는 편이었다. 그뒤 15년이 훨씬 넘는 시간이 흐르고 난 지금, 사회운동과의 관계에서 영화를 바라보는 그런 유의 책은 거기서 더 늘어나지 않은 상태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80년대와는 사회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지금에 영화운동(론)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쩌면 시대착오적인 일 또는 시쳇말로 ‘쿨’하지 않은 일로 여겨지고 있지나 않은지 모르겠다. 진보적 미디어운동 연구센터 프리즘이 엮은 <영화운동의 역사>는 그러나 절대 그런 게 아니라고 잘라 말하는 책이다. ‘진보적 영화운동’의 현재를 바르게 자리매김하기 위해 그 역사를 (다시) 배우는 일이 꼭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것이 제목도 ‘투박’하리만치 직설적으로(혹은 정직하게) 달고 있는 이 책인 것이다.
<영화운동의 역사>는 당시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을 담으려 했던 1920년대 소비에트영화에서부터 노동계급의 ‘함성’을 실으려 투쟁했던 미국의 무성영화, 바이마르공화국에서의 좌파적 영화운동 등을 거쳐 80년대 영국에서의 노동영상운동, 80년대 이후 한국 영화운동의 전개과정에 이르기까지 영화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지점들에 대해 논의한 글들을 모았다. 여기서 우리는 우선 정통(전통)적인 방식으로 기술된 영화사 책들에서는 거의 보지 못했던 역사들을 마주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이를테면, 미국의 무성영화 시기에, 그리고 1940년대의 할리우드에서 격렬한 계급투쟁이 벌어졌다는 것은 주로 스튜디오들의 진로를 중심으로 미국의 영화사를 서술하곤 하던 책들에서는 여간해선 잘 다루지 않았던 사실인 것이다. <영화운동의 역사>는 그렇게 지금껏 누락돼왔거나 ‘공백’으로 남겨져 있던 영화의 역사들을 메워내고 복원하려 노력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중요한 이론적 ‘투쟁’이라고 말한다. 책 가운데에서 한 문장을 빌리면 “역사를 어디에서 볼 것인가, 그것 자체가 투쟁이다”라는 것이다. 더불어 <영화운동의 역사>가 보여주는 또 다른 중요한 이론적 시도는 기존의 영화사적 해석에서 무언가 ‘신화화’된 부분을 제대로 ‘벗겨내는’ 작업일 것이다. 예컨대 “영화운동의 10월- 에이젠슈테인이나 베르토프도 이뤄내지 못한 영화혁명의 과업”(조동원)이란 글은, 1920년대 소비에트영화에 대한 연구에서 에이젠슈테인 같은 감독이 성취한 형식적 혁신만을 주목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 하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는 1920년대 “러시아라는 거대 실험실”에서 영화를 혁명의 대의에 동참하도록 하기 위해 미학적 실천말고도 제작과 배급 등의 측면에서도 다른 중요한 실천들이 이뤄졌음을 조목조목 기술한다. 1960년대 다큐멘터리운동을 ‘시네마 베리테’라는 스타일의 좁은 시각에서 건져내 더 넓은 컨텍스트 안에 위치시키려는 ‘시네마 베리테, 신화와 역사 사이’(강준상·이선화) 같은 글도 역사의 ‘탈신화화’를 겨냥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운동의 역사>는 영화운동의 관점에서 영화의 역사를 기술함으로써 역사기술의 문제와 영화의 역사를 전반적으로 재고하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아주 야심만만한 기획임에 틀림없다. 다만, 독창적이고 심층적인 논의가 개진되지 못한 것은 국내에서 이런 식의 연구가 아직 초보단계임을 감안해 격한 비판을 피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순조롭게’ 읽히지 못하는 몇몇 글들이 있다는 것은 못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진보적 미디어운동 연구센터 프리즘 엮음, 서울출판미디어, 1만8500원)홍성남/ 영화평론가 gnosis88@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