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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이 만들어줬나 보다
2001-03-29

배들리 드론 보이의 데뷔앨범 <`The Hour Of Bewilderbeast`>

배들리 드론 보이 <`The Hour Of Bewilderbeast`> 록레코드 발매

Q: 소설 구상은 어떻게 하시는지?

A: 제비가 물어다 주죠.

(성석제, 월간 <베스트셀러> 인터뷰중)

Q: 곡 만들 때의 비결이라면?

A: 요정들이 도와주죠.

(데이먼 고프, BBC Radio One 방송중)

다른 시간대와 다른 말을 쓰는 땅에 사는 이 두 사람이 서로 만났을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아니, 제로다.(만원 걸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된 창작물을 갖고 있는 이 두 사람은 상당히 유사한 능청을 떨고 있다. 그러나 주변 친구들에게서 소재를 얻는 경우가 실제

없지 않다는 성석제의 경우는 그렇다 쳐도, 지난해 말 영국 머큐리 뮤직 시상식에서 다른 열한장의 쟁쟁한 고참/중견들의 후보 작품을 제치고

데뷔앨범인 주제에 <`The Hour Of Bewilderbeast`>로 덥석 최고상을 받아버린 데이먼 고프, 즉 배들리 드론 보이(Badly

Drawn Boy)의 말은 진위여부가 불투명하다.

사실 <`The Hour Of Bewilderbeast`> 앨범이 나오기 전까지, 배들리 드론 보이가 자국 영국 내에서 선보여 서서히 반향을

일으켜 나갔던 일련의 미니 앨범(EP)들은 정말로 요정이 써준 듯한, 아무튼 뭔가 특별한 주문이 걸린 듯한 성깔 혹은 아우라가 있었다.

맨체스터 출신의 한 인디 뮤지션이 만들고 부른 그 노래들은 ‘인디라서 어쩔 수 없는’ 저렴한 DIY 경비와 ‘인디만이 할 수 있는’ 도저한

자긍심을 동시에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배들리 드론 보이는 신비스러운 영국 인디의 차세대 카리스마였다.

하지만 그 기대의 보답이었어야 했던 <`The Hour Of Bewilderbeast`>로 배들리 드론 보이는 실질적으로 신비를 벗어버렸다.

정말 나무 위의 요정이 써준 거라고 믿을 수도 있었던 음악은 실은 그가 오랫동안 자신의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친근하고 상냥한 노래들이었던

거다. 그는 나무 위가 아니라 땅에서 사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알고보니 상당히 낙천적인 사람이었다. 현재 앨범에서 세 번째 싱글 커트된 놀라운(지금까지 그의 닉네임은 “벡(Beck)에 대한 영국의

대답”이었다) 모타운 스타일의 <`Disillusion`>은 (뮤직비디오는 옵션) 의외로 사랑스럽고, 자신의 아내 클레어를 백보컬로 앉혀놓고

부르는 <묘비명>(Epitaph)은 포크의 매력을 빌린 진심어린 러브송이다. 사실 그가 벡이기보다는 엘리엇 스미스(Elliott Smith)에

대한 대답이 아닐까 싶은 의문은 <`Camping Next To Water`>와 <`Stone On The Water`>의 매혹적인 진행에서

마치 당연한 듯 들기도 한다.

비록 배들리 드론 보이 자신이 최고의 곡이라고 했고 많은 젊은이들이 거기에 동의했던 위풍당당한 <`It Came From The Ground`>는

이번에 실려 있지 않지만, 대신 EP 시절의 영광을 그 곡과 함께 누렸던 또다른 인디 명곡이자 더할 나위 없는 팝송 <`Once Around

The Block`>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아마 뭐니뭐니해도 이 앨범 최고의 지복일 것이다. 이 곡에서만큼은 분명히, 요정이 살고 있다.

성문영/ 팝음악애호가 montypytho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