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룩의 간을 빼먹는다는 말이 있다. 어떤 인간의 집요하고도 야비한 행동을 꾸짖는 것일 텐데, 정말 문자 그대로 벼룩의 간을 빼먹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경탄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생각해보라. 날뛰는 벼룩을 포획하는 것도 쉽지 않고, 배를 째기 위해 고정시켜놓기도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래도 어찌어찌 벼룩의 여섯 다리를 바닥에 붙여놓고 핀셋으로 간을 꺼내다보면, 이 하찮은 생물이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는지 또 한번 놀라게 될 것이다. 이제는 벼룩에게 박수를 보내야 할 때다.
‘벼룩 만화 총서’라는 희한한 제목의 만화가 찾아왔다. 불과 200여쪽의 만화책도 무겁다고 낑낑대는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희소식이다. 이 벼룩들은 불과 10여쪽의 작은 손바닥 정도 크기로, 선풍기를 심하게 틀면 날아가버리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다. 그러나 그 작은 몸집과 변변찮은 물리적 무게 때문에 이 만화들을 얕잡아 보아서는 안 된다. 그 내면의 무게는 수백쪽의 만화도 너끈히 맞설 수 있을 정도다.
현실문화연구에서 발간하기 시작한 벼룩 만화 총서의 첫 번째 8권은 비닐 봉지에 담긴 한 세트로 만져보는 것이 제맛이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의 젊은 만화가들이 제각각의 아이디어를 개성적인 그래픽으로 풀어나간 작품들의 묶음은 마치 여러 가수들의 노래들을 함께 담아놓은 옴니버스 앨범처럼 느껴진다. 이야기의 줄기보다는 감성적인 이미지로 더 큰 의미를 전달한다는 데서도 음악적 성격이 풍겨나오고, 반복되는 운율 속에서 만화를 읽기보다는 읊조리게 만드는 구조 역시 한편의 발라드를 듣는 듯하다.반복과 변주는 여러 작품에서 발견된다. 사르동의 <죽음>에서는 큰 저택에 사는 꼬마가 일가 친척과 가정부, 정원사 등 모든 사람들이 죽어 있는 것을 차례차례 발견한다. 처음에는 사건의 비밀을 풀어가는 추리물을 기대하게 되지만, 미스터리의 진전없이 그저 이미지를 변주해가는 장면의 반복 속에서 이것이 죽음의 의미를 전혀 모르는 꼬마의 의식 속에 생기는 무의미한 파동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J. C. 므뉘의 <산란주의>(Omelette)에서는 긴 다리를 가진 새가 알을 낳는 즉시 그 알이 깨져 제목처럼 오믈렛이 되어버리는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그리고 있다. 탕크렐의 <목 매 죽은 꼬마의 발라드>는 해골과 말라버린 몸뿐인 꼬마의 시체가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뜻하지 않은 여행을 하는 이야기가 조금씩 상황을 바꾸며 변주되고 있다. 모두 다 마지막 반전으로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는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파도 속에 몸을 띄우게 한다.
그 밖에도 제목 그대로 금붕어의 자살을 다룬 조안 스파로의 <금붕어, 죽음을 택하다>, 사형수의 최후를 다섯 손가락들의 클로즈업으로만 그려나간 토마스 오트의 <야만- 다섯 손가락에게> 등 죽음과 같은 진지한 주제를 때론 천연덕스러운 유머로 때론 극도의 긴장과 아이러니로 보여주는 작품들이 많다. 드니 부르도의 <이웃들>이나 바루&다비드 B.의 <엄마는 문제가 있다> 등은 가족과 이웃이라는 인간사회의 문제를 교묘한 은유로 파고 들어간다. 형식적으로는 30∼40년대의 복고적 취향의 만화라 할 수 있는 스타니슬라스의 <황당한 씨 이야기>도 편안한 전통의 만화를 보여주는 척 하며 날카로운 메시지를 던진다.이들 작품들은 주제의 유사성뿐만 아니라, 흑백의 명료한 대조 속에 간명한 아이디어를 분명한 형상력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1980년대 아트 슈피겔만과 동료 만화가들이 잡지 <로>(Raw)를 중심으로 벌여간 전위 만화의 색채와도 일맥상통한다. 화려한 컬러로 무궁무진한 판타지 날개를 펼쳐나간 서구 만화세계에서 흑백의 단조로운 듯 또렷한 이미지는 전혀 다른 감성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카프카의 소설이나 프리츠 랑 등의 표현주의영화로부터도 진한 피를 이어받은 이 만화들은 저예산의 팬진(fanzine)과 언더그라운드 만화공간에서 오랜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이번에 발간된 벼룩 만화 총서의 첫 시리즈들은 전체적으로 상당한 수준에 올라와 있지만,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자족적인 틀에 갇혀 있는 느낌 역시 지울 수 없다. <로>의 여러 작품들이 ‘벼룩 만화’ 이상의 실험성을 보여주면서도 풍부하고도 세련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을 볼 때, 아직 이 젊은 만화가들의 설익음이 눈에 거슬리기도 한다. <죽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과도한 미술적 장식, <이웃들>에 넘쳐나는 설명적 어구들은 한쪽의 독자들에게는 더 큰 매력을 주는 것이기는 하겠지만 어떤 균형에서는 벗어나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몇몇 불만에도 불과하고 이들은 훌륭한 벼룩들이다. 한글 타이포의 사용에도 미적인 균형을 고려하고, 그래픽적인 요소가 강한 글들은 원어를 살려두고 작게 번역을 붙인 세심한 고려들도 번역판에서 흔히 느끼는 아쉬움을 상당부분 상쇄시킨다. 작지만 훌륭한 벼룩을 만들기 위해서는 만화가뿐만 아니라 편집자, 편집디자이너, 인쇄 제본의 마지막 손길까지 정성이 깃들여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책이다. 국내의 젊은 만화가들이 그려낸 훌륭한 벼룩들도 이 시리즈를 통해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