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구, 이거 돈깨나 깨졌어…. 그렇게 말하면서 이시영(시인·당시 <창작과비평사> 부사장)은 이 책을 건네줬었다.
창비야 원래 책 인심이 후한 데고, 내가 ‘사회주의자’ 시늉을 요란히 한 적도 있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도 않는데(사실 그런 책이 있는지도 몰랐다), 더군다나 고가의 사전을 거저 준다는 것은, 장사는커녕 애초부터 손해볼 생각하고, 아니 거의 재산 사회환원 차원의 기증용으로 만들었다는 뜻이겠다. 이시영도 말만 그랬지, 표정은 세금낸 사람의 억울함 플러스에 후련함 마이너스로 덤덤했다.
이 책은 사실 운이 좋다. 사회주의운동이 퇴조 정도가 아니라 부관참시되던 1996년에 나온 것.
아나키스트 운동사는 마지막 아나키스트들이 십시일반하여 300부 한정판으로 찍었고 시중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 책을 펴낸 이중 하나인 이진섭에게 한권 선물받았었다. 이진섭은 한때 기자였다가 당시 출판사 근무를 했는데 창비에 <동의보감> 원고를 주선해준 일등공신이다. 지금은 소식이 없는데 정말 아나키스트 활동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위 책은, ‘권위있는’ 출판사 창비에서 펴낸 책답게, 그리고 ‘권위없는’ 출판사에서 나온, 뜻은 좋지만 뜻만 좋을 뿐 내용이 허술하고 장정이 조잡하며 교정이 엉망이고 쓸데없이 거대하고 표지가 무거운, 그래서 무모하고 딱할 뿐 아니라 고루해보이는 사전류 대부분과 달리, 산뜻하고 알차고 치밀하다. 준비에 10년 이상 걸렸고(내가 보기에 특히 강만길은 짧은 산문 원고 받는 데도 진을 빼는, ‘학구적이지만 게으른’ 사람이고, ‘학구적으로 게으른’ 사람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교정 실력자들이 동원되었고 객관적이되 메마르지 않고 단아한 문장을 구사했다.
내용은, 구류 며칠 산 사람까지 포괄할 정도로 자세하다. ‘구류’라고 했는데 사실 ‘징역 안 산’ 사회주의자들이 빠져 있는 게 이 책의 하자라면 하자겠지만 그거야 지금 바라기조차 민망한 일이겠고.
사회주의 ‘경력자’들은 물론 이 책에서 남다른 감회를 느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들과 학자용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전투적’ 사회주의자들의 생애가 ‘짧고 단아한’ 문단으로 정리된 각 항목들을 읽는 일은 문학적 감동까지 자아내는 바 있어 누구든 읽는 재미가 쏠쏠할 것이다. 김정환/ 시인·소설가 maydapoe@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