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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추천도서 - <전교생의 사랑>
김송희(자유기고가) 사진 최성열 2025-10-21

박민정 지음 문학동네 펴냄

“하루미는 슬픔을 훌훌 털고 일어날 줄 알았어. 내가 악평을 읽고 울고 있을 때면 다가와서, ‘계속 울어, 울어봤자 남는 건 울음을 그쳐야 한다는 사실뿐이라는 걸 깨달을 때까지’ 하고 무섭게 말하곤 했지.” 소설집 중 <나는 지금 빛나고 있어요>의 문장을 읽고 엘라 휠러 윌콕스의 시구 “웃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게 될 것이다”가 떠올랐다. <올드보이>에 나와 더 유명해진 구절이다. 이르게 연예계에 뛰어든 아역배우들의 착취 문제, 일본 AV의 성폭력, 화려한 아이돌 산업 뒤편의 그림자, 코로나 시대 대학의 표피적 관계와 온라인 강의의 표절 문제 등 박민정 소설집에 담긴 소설들은 그가 왜 사회파 소설가라 불리는지 가늠케 한다. 그러나 정녕 그게 소설집을 설명할 수 있는 전부일까. 그것만으로는 어쩐지 부족하다 싶다. 분명 세상에 존재했고, 여전히 종식되지 못한 사회문제들과 그 속에서 실패하며 인생의 어떤 시절을 상실해버린 인물들을 소설은 담담하게 보여준다. 아니, 상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끝내 훼손당하지 않은 채 꿋꿋하게 이겨나간 여자들은 신문 한켠에 A씨, J씨로 다뤄질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나이고, 또 너였으며, 언젠가는 나의 언니나 동생, 친구였던 여자들이다. 표제작 <전교생의 사랑>은 아역배우 출신이었지만 배우로는 실패해 성인이 된 후 다른 일을 하는 민지와 세리가 주인공인데 이 두 사람을 보고 있으면 독자들은 각기 어떤 이를 떠올릴 수도 있다. 그것은 아역배우일 수도 있고, 대중으로부터 잊힌 어떤 인물일 수도 있다. ‘잊혀질 권리’를 말하는 소설에서 우리는 유명인을 다루는 한국 사회의 저속한 편견과는 다른 진짜 서사를 발견한다. ‘아역으로서는 실패했을지 몰라도 인간으로는 실패하지 않았다’(17쪽)와 같이. 소설 <나의 사촌 리사>와 <나는 지금 빛나고 있어요><누군가 어 디에서 나를 기다리면 좋겠다>에는 같은 인물들이 사건을 달리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여기서도 우리는 같은 애수를 발견한다. 주인공도, 화자도, 심지어 독자조차도 박민정 소설에서는 대상화되지 않는다. 누군가를 대상화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창조주에 의해 인물은 내가 되고 우리가 되어 살아 있다. 덕분에 우리는 주체적인 여성들의 우정을 만난다. 그래서 다시 돌아가, “웃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우리가 너와 함께 울어줄 것이다”라고 소설은 시구를 다시 쓰고 있다.

결국 나는 이야기를 쓰는 일을 해내지 못했다. 교수의 말이 오히려 발목을 잡았다. 그는 가슴 밑바닥에 있는 서러움을 지껄여버리는 건 임상 기록일 뿐이지 사람들을 설득하는 이야기가 될 수 없다고 그랬다. <누군가 어디에서 나를 기다리면 좋겠다>, 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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