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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추천도서 - <말뚝들>
김송희(자유기고가) 사진 백종헌 2025-09-16

김홍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도대체 얼마나 불행한 일을 겪었기에 저러나 싶었다. “장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행이 찾아왔을 때 불행이란 단어가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는 데 한참이나 모자람을 깨달았다.” 오호라. 대체 불행이 어느 정도이기에 이렇게 자기 연민을 한담? 그는 “이 불행이 전부 내 것이라고? 이렇게나 크고 많은 것이? 이 정도 불행이면 모두가 함께 나눠야 하지 않나?”라고까지 생각한다. 저마다 자신이 가장 불행하다 여기는 한국에서 주인공 장은 무슨 일을 겪었기에 이렇게 ‘불행의 크기'에 자부하는 것일까.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심지어 심사위원 만장일치라고 한다) <말뚝들>은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를 자문하는 남자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은행에서 대출 심사를 담당하는 장은 본부장 눈 밖에 나 유배 중이다. 감정평가사를 따라 전국을 돌며 담보 물건을 확인하는 것이 장의 하루. 여느 날과 다를 게 없는 출근길, 자동차 와이퍼에 꽂힌 쪽지에 “트렁크에 넣어뒀습니다”를 발견한 그는 트렁크에 갇혀 납치를 당한다. 장은 트렁크에 갇혀서 자신에게 이런 짓을 할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대출을 거절했던 사업체들의 사장님들, 돈 좀 빌려달라 했던 지인들. 용의자 목록은 끝도 없다. 트렁크에 갇혀 바지에 오줌똥을 싼 채로 장은 풀려나고 다시 차를 몰고 집에 돌아와 경찰에 신고한다. 여기까지만 읽어도 첫장에 주인공이 호언장담했던 불행의 크기에 납득이 되지만, 더 큰 불행은 그가 복귀한 사회에서 이어진다. 납치 전에도 파혼당하고 팍팍한 회사 생활을 살던 장의 일상은 납치 트라우마로 인해 더 망가지고 호의적인 줄 알았던 동료가 그를 속였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 여기에 소설의 제목인 말뚝들은 ‘재난문자’로 장의 일상에 시시각각 출현한다. 오물 풍선이나 정체 모를 비행체를 재난문자에서 본 적은 있어도 말뚝들이라니. 게다가 그 말뚝들이 해변 어딘가도 아니고 광화문 한복판에 나타나는 광경은 도무지 상상하기가 어렵다.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라고 명시된 소설을 보면 적어도 재미는 있겠구나, 믿는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이 문학상을 받았던 소설들은 한국 소설이 주는 궁극의 재미와 함께 한국 사회의 이상 징후까지 담아내 사회적 메시지와 몰입감을 주는 작품이 다수였다. 대출 심사 은행원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이 불행한 일을 겪고, 그가 살고 있는 사회 역시 점점 악화 일로를 걷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모든 상황을 거침없이 엮어서 능청스럽게 밀어붙이는 이 소설 역시 그러하다.

입을 다문 말뚝들의 표정을 보고 있으면 명상하는 기분이 들었다. 반가사유상의 얼굴과도 닮았다. 불쑥불쑥 찾아오는 어깨의 통증과 공포스러운 기억 속에서 장이 평안해질 수 있는 순간은 그 얼굴을 감상할 때뿐이었다. /85쪽